읽어본 책

정의란 무엇인가

뻔돌이 2018. 12. 29. 20:24



한국에서 어마어마하게 팔린 밀리언셀러라는데 출간 당시 난 책에는 관심이 없던 때여서 잘 모르겠다. 아무튼 엄청 유명한 책인가보다. 이 출판사에서 저자의 책을 몇 권 더 출판한 게 있는데, 그 중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완벽에 대한 반론> 도 같이 사서 읽었다. 철학책이어서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어렵지도 않다. 근데 다 읽고나면 생각이 정리되기 보다는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지고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두 번 읽었는데도 그렇다. 이것도 맞는 것 같고, 저것도 맞는 것 같고, 더 생각해보면 다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다시 생각해보면 또 오락가락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지금까지 살면서 생각해왔던 것과는 다르게 나 자신의 가치관이 아직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나보다,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저자가 생각하는 방식은 한마디로 변증법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하고, 그 판단을 하게 된 이유를 생각하여 그 근거가 되는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에 반하는 또 다른 구체적인 상황을 찾아내고, 그러면서 원칙을 재구성하거나 자신의 판단을 조정하면서 논리적인 모순을 제거해나가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약점은 잘못하면 편견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 사고는 자기 성찰만으로는 부족하고 여럿이 함께 노력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의 전체적인 흐름 역시 변증법적이다. 공리주의, 자유주의, 아리스토텔레스 등 여러가지 서양철학을 하나씩 살펴보며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면을 따져보고 마지막에 공동체와 공동선, 영예와 미덕에 대한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는데, 저자 스스로는 자신이 공동체주의자는 아니라고 한다. 공리주의와 자유주의의 가치를 모두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 중요성 역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명제나 원칙 같은 것으로 요약해서 짧게 한 마디로 말하기는 좀 애매하지만 굳이 하자면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찰하는 것' 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니면 '공공철학의 생활화' 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정의에 대해서 말한다면, 삶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소득, 부, 의무, 권리, 권력, 기회, 공직, 명예 등이 어떻게 배분되고 있으며 또 어떻게 배분되어야 옳은가, 누가 그런 것을 가질 자격 혹은 권리가 있는가를 따져보게 된다. 이 때 주로 경쟁하는 가치와 이상은 공리와 복지, 자유, 미덕으로 나눌 수 있다. 물론 모두 중요하지만 상황에 따라 그 중 한두 개를 버려야 할 때가 있다. 이럴 때 서양철학은 언제나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보편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절대 진리나 원칙을 세우려고 하는 것 같다. 유일신 사상의 영향일까. 상황에 따라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은 일관성 없는 모순이라고 보는 것 같다. 그런 고지식한 원칙주의는 명쾌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극단적으로 흘러가기도 하고 환경이 복잡해짐에 따라 점점 뜻밖의 모순적인 상황에 빠져드는 일이 많아지게 된다. 이 책에 나오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보면 하나의 원칙만 따라서 판단하기 곤란한 것들이 많다.


도덕적인 가치를 판단할 때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아마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원칙으로 정리할 수 있는 공리주의일 것이다. 민주주의 시대에서 여러 집단이 서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경우 선거 등을 통한 간접적인 다수결을 통해 해결을 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공리를 내세우면 좀 덜 이기적으로 보이고 명분 만들기에도 좋아 다수에게 호소하기에는 더 유리하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밴담은 자연권이라는 생각을 애들이나 하는 헛소리라고 조롱했다고 한다. 정말 그런 말을 했다면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여러 면에서 공리주의 발상 자체는 거부할 수 없는 호소력과 매력이 있다. 그러나 소수집단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훼손할 수도 있는 것, 행복을 쾌감과 고통으로 단순화해서 수치화하고 계량화해서 양적으로 계산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는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다. 밴담의 뒤를 이은 존 스튜어트 밀은 '배부른 돼지보다 불만족스러운 인간이 되겠다' 라며 행복과 쾌락의 질을 주장하고 양적 공리주의를 질적 공리주의로 개량하려 했지만, 저자는 오히려 그런 점을 들어 그가 공리를 넘어서는 도덕적 이상과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했다고 보았다. 대체로 철학책에서는 그를 밴담의 공리주의 후계자로 구분하지만 아주 가끔 자유주의자로 구분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밴담이 주장한 쾌락을 계산하는 방법이 구체적으로 뭔지는 모르겠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달라서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똑같은 것이라도 개인에 따라 느끼는 쾌락의 정도는 다를 수 있고, 어떤 사람들은 쾌락을 느낄 수 있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고통을 느낄 수도 있다. 결국 공리주의는 어떤 것에 더 큰 가치를 두고 더 좋은 것이라고 판단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그 기준이 다르다면 똑같이 공리를 말하지만 전혀 다른 상반된 주장을 펼칠 수 있다. 공리를 근거로 공산주의 뿐만 아니라 독재자를 정당화할 수도 있다. 박정희를 옹호하는 입장도 보면 대체로 그렇다. 방법이 어떠했든 전보다는 잘 살게 되지 않았는가? 반대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 보장을 더 옹호할 수도 있다. 자유과 권리 그 자체가 주는 행복감도 있고, 또 그런 감정이 있어야 사람들이 더 열심히 자발적이고 창조적으로 일할 수 있으며, 그래야 사회가 더 발전하여 모두가 더 행복해진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사실 어떤 쾌락이든 행복이든 그것에 다다르고 누리기 위한 수단이나 배경에는 대체로 일정 수준 이상의 부가 필요하다. 추위과 배고픔과 질병에 고통받으면서 행복해지기는 힘들다. 이미 오래전부터 경제적 이익이 쾌락이나 행복을 평가하기 위한 객관적인 양적 질적 기준으로 통일된 것 같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삶은 기본적인 수준을 유지하는 것조차 점점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한다. 욕망은 더욱 커지고 또 다양해지고 있다. 불평등이 커짐에 따라 절대적인 만족감보다 상대적인 상실감이 더 부각되어 불만과 고통이 조장되고 있다. 자본주의의 품에서 새롭게 재창조된 쾌락과 행복은 누리면 누릴수록 빠르게 만족감이 떨어지고 무감각해진다. 그럴수록 더 많은 돈이 필요해진다. 이 때문에 오히려 모든 사람들의 행복감이 줄어드는 것은 아닐까? 점점 더 복잡한 사회에서 경제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예측 능력은 점점 더 형편 없어지는데, 경제적 이익을 제대로 계산하고 예측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는 할까? 그게 가능하다 해도 언제까지의 이익을 계산해야 할까? 당장의 이익? 아니면 10년 후? 아니면 100년 후? 당장은 손해라 해도 나중엔 더 이익일 수도 있고, 그 반대로 당장은 좋을 지 몰라도 나중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될 수도 있다. 아니, 어찌보면 결국은 다 그게 그거일 수도 있다. 세상엔 창조보다는 나눠먹기 제로섬 게임이 더 많은데, 어차피 나중에 다 똑같아지는 거라면 아무거나 해도 상관없는 거 아닌가? 사람들이 이에 대한 진지한 고민없이 겉으로는 공리를 내세우며 실제로는 당장 자기의 이익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개인의 자유 또한 중요한 도덕적 가치이다. 천부권, 자연권, 기본권 같은 여러가지 멋드러진 말들로 부르기도 한다. 자유라는 말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국가 혹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 특정 사회 계층이나 공동체 혹은 사회 제도가 개인이나 피지배 집단에 가하는 억압과 폭력에 대항하는 개념으로 자유라는 말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누가 그랬더라? 미국 독립운동 때였던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어느 나라이건 모든 국민들이 자유를 얻기까지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쳐야 했다. 오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의 국민들이 자유라는 말을 써가며 실제로 자유를 누리기 시작한 건 오십년도 안된다. 그렇게 힘들게 얻은 자유는 대체로 정치적인 자유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게 너무 당연한 것처럼 여겨져서, 아마 자유라고 하면 대부분 정치적인 관점보다는 개인적인 선택의 자유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똑같이 자유를 외치는 사람이라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맥락에 따라 태도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자유를 말할 때는 언제나 그에 따르는 책임이나 다른 사람의 자유와 충돌을 일으키는 경우를 고민하기 마련인데, 사람들마다 입장이나 관점에 따라 차이가 난다. 흔히 말하는 보수파는 주로 경제적인 관점에서 자유를 신봉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그렇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신자유주의자 중에는 보수파가 많다. 반대로 진보파는 사회 문화적인 관점에서 자유를 더욱 중요시한다. 사회자유주의자 중에는 진보파가 많다. 자유주의로 뭉뚱그려 말하는데 어찌 그리 다른지 모르겠다. 누군가 자유를 말한다면 구체적으로 도대체 누구의 어떤 자유를 말하는 건지 잘 생각해봐야 한다.


저자는 자유주의 중에서 특히 자유지상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자유시장주의를 장기거래, 안락사, 징병제와 모병제, 대리모 논쟁 등을 통해 비판한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에서는 더욱 다양한 사례를 들어 구체적으로 시장 논리를 비판하고 있다. 자유시장을 반박하고 비판하는 근거는 대략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자유시장주의의 주장이나 기대와는 달리 시장에서의 거래가 평등하고 공정하면서 자유롭고 자발적인 합의나 계약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자유시장이 소중한 미덕과 가치를 훼손시키고 공동체를 파괴하면서 무절제하게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공리나 개인의 자유만 생각한다면 수천 수백년 동안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아온 전통과 미덕들이 위협받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그런 것들은 버려야 하는 걸까? 아니면 소중하게 지켜야 하는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그에 대한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으로 중간에 이마누엘 칸트의 철학를 소개한 것 같기도 한데, 칸트의 철학은 좀 어려운 내용이라 솔직히 전체적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중간중간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들이 있다. 자율과 타율의 차이를 통해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를 묻는 부분에서는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라캉의 욕망이론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와 비슷한 것으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도 오래 전부터 논쟁거리이다. 행위나 결과 자체보다는 동기가 더 중요하다는 주장도 공감이 간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감추어진 진심을 궁금해하며 그를 통해 진정성을 파악하려고 한다. 어떤 사람이 호의를 베풀더라도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다지 고마움도 느껴지지 않는다. 누군가 착한 일을 하고나서 그게 옳은 일이기 때문에 그랬다고 하지 않고 칭찬을 받기 위해서라던가 자존심이나 자기 만족을 위해서 그랬다고 한다면 진정성을 느끼기 힘들고 그 선행에 가치나 의미를 느끼기 힘들 것이다. 칸트의 두가지 정언명령도 진지하게 생각하고 한 번쯤은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할만 하다. 첫째는 '당신의 의지의 준칙을 보편화하라' 는 것이다. 무슨 말을 그리 어렵게 할까 싶었는데, 쉬운 말로 풀이하면 '모순 없이 보편화할 수 있는 원칙에 따라서만 행동해야 한다' 는 뜻이라고 한다. 둘째는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 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로서 존엄성을 가지고 그 존재 자체로도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통해 칸트가 이끌어내고 주장하는 보편적 의무로서의 도덕법칙은, 흠 뭐랄까, 좀 더 융통성이 있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특히 자기 집에 숨어있는 친구를 죽이려고 찾아온 살인자에게까지 거짓말하면 안된다는 부분은 좀 억지인 것 같다. 


갈수록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존 롤스의 정의론은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평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원초적으로 평등한 위치를 가정한 '무지의 장막' 에서 선택하고 합의하는 가상적 사회 계약으로부터 정의의 원칙을 이끌어내는 과정은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역지사지와 비슷해보이기도 하다. 싫든 좋든 더불어 살아야 하는 사회에서 누구나 가끔씩은 그런 생각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남의 불행한 일이 나에게도 닥칠 수 있다는 생각을 늘 하고 사회 정의 실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로섬 토너먼트 게임의 세계와 같은 경쟁 사회 제도에서는 반드시 패배자가 생긴다는 점에서 사회 경제적 불평등은 필연적이라고 본다. 노년층 빈곤 문제도 그렇다. 사람들은 누구나 늙는다. 살아남기만 한다면 말이다. 노년에 가난한 것이 젊어서 노력을 안한 탓일까? 만약 그게 아니라 사회적 구조의 문제라면 노년층 빈곤 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젊은 사람들이 당장 자기 돈이 나간다고 노인 복지에 불만을 갖고 반대한다면 자신들이 늙었을 때 똑같이 버림받을 것이다. 물론 칸트라면 이런 식의 불순한 동기와 가언명령에 반대할테지만.


롤스가 이러한 가상의 사고 실험을 통해 모두가 합의하고 동의할 것이라고 추측한 정의의 원칙은 두가지이다. 첫째는 기본 자유가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약자들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경우에만 사회 경제적 불평등을 인정한다는 '차등 원칙' 이다. 언뜻 생각하면 좋은 것 같긴 한데, 잘못하면 이미 사회 경제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에게 역이용당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불평등과 양극화 해소 방안으로 낙수효과를 주장하는 경우를 보면 롤스의 차등 원칙에 딱 들어맞아 보인다. 원칙이라고 하지만 해석하고 적용하기에 따라 귀걸이도 되고 코걸이도 되는 것 갈다. 


롤스의 주장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능력주의와 자유시장주의는 임의적이고 우연적인 요소를 고려하지 않아 소득과 부를 공정하게 배분하지 못한다고 지적한 것이다. 임의적이고 우연적인 요소란 유복한 가정환경, 특정한 자질이나 재능을 요구하는 시대적 사회환경 같은 것인데, 그 때문에 기회 균등이 공정하게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회 균등을 전제로 한 능력주의와 자유시장주의 역시 공정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임의적인 요소를 완화하고 그 차이를 좁혀 더 공정한 기회 균등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인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체로 이미 사회 경제적으로 상위에 속한 보수 성향의 사람들은 성공은 재능 뿐 아니라 절제, 인내, 근면, 성실, 노력과 같은 미덕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며 소득 분배와 복지를 반대하는데, 그를 비판하고 더 적극적인 분배 정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과 비슷한 내용이다.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 를 보면 성공에 영향을 끼치는 행운과 불운의 엄청난 힘에 놀라게 된다.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장하준의 책들에도 비슷한 내용들이 나온다.


임의적 요소라는 것에 대한 롤스의 주장을 따라가면, 분배 정의는 도덕적 자격을 포상하는 것이 아니라 합법적인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니까 사회 협력의 조건과 규칙에 따라 이익을 가질 권리가 생기는 것이지, 마땅히 이익을 누릴 도덕적 자격이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성공한 사람들의 자만심을 일깨워주고 약자들에 대한 사회적인 책임과 안전망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절제나 노력 같은 도덕적 자격을 강조하다보면 성공한 사람들은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며, 도덕적 자격이 부족하여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벌을 받아 마땅하므로 가난하게 사는 것도 당연하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그런 생각이 확장되면 갑질이 정당화된다. 실제로 갑질하는 사람들의 심리에는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생각이 깔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https://infuture.kr/1326) 그런 통념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불평등과 양극화의 심화는 피할 수 없는 결과다.


하지만 분배 정의에서 게임의 규칙만 강조하고 도덕적 자격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과연 좋을 지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롤스는 타고난 재능까지도 임의적 요소로 보았는데, 그 재능을 키우고 가꾸어 성공한 사람 입장에서는 서운할 것 같다.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 중에는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지만 남다른 열정과 노력으로 자수성가하여 말 그대로 개천에서 용이 된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도덕적 가치를 더 높게 평가받고 싶을 것이다. 사실 좋은 환경에서 자란다고 해도 모두 똑같이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그 중에서도 특별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행운이 중요하다고 해도 결정적인 행운은 가만히 방에 앉아있다고 해서 저절로 찾아오지는 않는다. 적극적으로 찾아 돌아다녀야 만날 수 있다. 로또를 사야 로또가 당첨되든 말든 할 것 아닌가? 자신의 성공이 행운의 결과라 해도 그 행운을 만나기 위해 땀흘려 뛰어다닌 수고는 인정받아야 하지 않을까? 또 도덕적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으면 과정보다 결과만을 중시하게 될 것이다. 합법적인 권리만을 인정하고 도덕적 가치를 부정하면 그 때문에 억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기계적인 원칙만 강조하는 공리주의나 자유지상주의보다는 롤스식 자유주의가 좀 더 나은 것 같지만, 그래도 여전히 따뜻한 인간미는 아쉬운 느낌이다.


롤스와 같이 근현대의 정의론은 대부분 도덕적 가치에서 중립적인 정의의 원칙을 찾고자 하는데, 저자는 그럴 수 없다고 주장한다. 대학의 소수집단 우대 정책과 그에 따른 역차별 논쟁을 보면 학교와 같은 사회 기관의 사명과 목적이 무엇인지 따져보게 되는데, 그 때 어떤 자질이 영예와 포상의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어떤 고등학교의 미식축구 응원단원인 캘리 스마트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뇌성마비를 앓아서 휠체어를 타야했지만 캘리는 열심히 했고 사람들은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시즌이 끝나고 캘리는 학교 관계자에게 다른 단원들처럼 다리 일자 뻗기와 공중회전 같은 체조 훈련을 하지 않으면 응원단에서 방출하겠다는 통보를 받았고, 그럴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그녀는 결국 방출되었다. 알고보니 그게 응원단장의 아버지가 학부모들의 여론을 조성한 것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응원단장의 너그럽지 못한 아버지가 분노한 이유는 응원단원으로서 뛰어난 기량을 인정받는 자신의 딸이 마땅히 누려야 할 영예의 가치가 캘리에 의해 조롱받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저자는 캘리 사례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을 소개하며 정의는 목적론에 근거하며 영예를 안겨준다는 것을 그 핵심으로 꼽았다. 권리를 정의하려면 해당 사회적 행위의 텔로스(목적, 핵심 본질)를 이해해야 하며, 또 어떤 행위의 텔로스를 추론하거나 주장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는 그 행위가 어떤 미덕에 영예와 포상을 안겨줄 것인가를 추론하거나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란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걸 의미한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다는 걸 어떻게 판단할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배분할 재화의 목적을 살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플루트를 배분하는 것을 예로 들면, 플루트의 존재 이유는 뛰어난 음악을 만드는 것이므로, 이 목적을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보다 그것을 가질 자격이 있다. 이런 주장을 다시 정리하자면, 정의와 권리에 대한 논의는 대게 텔로스에 관한 논의이며, 그에 따라 어떤 미덕에 영예와 포상을 안겨주어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견해들이 경쟁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정치 철학에서도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따르면 정치의 목적은 좋은 시민을 양성하고 좋은 자질을 배양하여 좋은 삶을 이루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정치 공동체는 협약에 의한 단순한 조직이나 결사체를 초월한 것으로 보았다. 법의 목적은 시민들이 좋은 습관을 길러 올바른 인격을 형성하고 행동을 통해 도덕을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민의 자질과 미덕이 가장 뛰어나고 공동선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최고 공직과 영예를 가질 자격이 있다고 보았다. 음, 만약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명심보감이나 논어 맹자 같은 것을 그리스어로 번역해 주었다면 정말 재미있게 읽었을 것 같다. 난 제대로 읽어본 적 없지만...이쯤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소 따분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저자가 인용한 니코마쿠스 윤리학의 구절을 보면 의외로 유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며, 우리에게 선한 것이 무엇인가의 문제는, 우리의 건강이 그렇듯이 늘 변한다. (...) 의술이나 항해술이 그러하듯이, 행위자 스스로 이 상황에는 어떤 행동이 적절한지 그때그때 파악해야 한다. (...) 실천적 지혜가 있는 사람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 그리고 인류 모두에게 무엇이 이로운지 심사숙고할 줄 안다. (...) 그것은 주어진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인간의 최고 선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다." 


음, 그런데, 캘리를 응원단에서 쫒아낸 게 옳다는 건지 그렇지 않다는 건지 결론을 내리지 않고 캘리와 비슷한 또 다른 사례를 들었다. 케이시 마틴이라는 다리가 불편한 프로 골프 선수가 혈액 순환 장애로 골프 코스를 걸어가면 고통이 심하고 출혈과 골절 등의 위험이 있어서 시합 중에 골프 카트를 이용하게 해달라고 미국 프로골퍼협회(PGA)에 요청했는데, 거절을 당하고 이어서 소송을 제기한 사건이다. 다른 골프 선수들도 카트 사용을 반대했다고 하는데, 저자는 그 이유를 선수들이 골프가 스포츠로서 힘든 육체적 대결이 있는 경기로 보여야 자신들이 선수로서 받게 될 영예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단순히 공정성 문제라면 모든 선수가 카트를 이용하게 하면 될텐데 아무도 그런 대안을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논란은 단순히 공정성에 대한 것을 넘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영예와 인정에 관한 논란이고, 결국 정의를 말할 때는 좋은 삶의 본질에 대한 논의가 불가피하다며...역시 결론을 내리지 않고 그냥 넘어간다. 샌델 이 아저씨...가만 보면 대체로 이런 식으로 자기가 생각하는 정답을 말하지 않고 그냥 질문을 던지고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 것 같다. 


응원단장 아버지나 카트 사용을 반대한 선수들이나 그냥 자존심이 상한 거 같은데. 자기는 고생을 해서 겨우 얻은 것을 다른 사람이 손쉽게 얻으면 약이 오르고 자신이 헛고생한 것 같아 허무해지기도 하면서 그 동안의 노력이 하찮아 보이는 것 같아 기분 상하는 상황 아닌가?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를 높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견제하는 방어벽을 치곤 한다. 자기가 하는 일을 되도록 어렵고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며 오랜 기간 노력해야 가능한 일로 보이고 싶어한다. 남들이 쉽게 하지 못하는 일을 해야 무시받지 않고 존중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는 일을 누군가가 하찮거나 별 거 아닌 쉬운 일 쯤으로 여긴다면 기분이 상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무시당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소규모 집단에서 비공식적으로 행하는 일종의 테스트성 통과의례는 스스로 자존심과 자부심을 높이려는 심리가 있다. 별 거 아닌 친목 모임이나 동아리도 회원을 받을 때 엄격한 기준을 두기도 한다. 어떤 회사들은 신입사원들에게 빡쎈 극기훈련을 시키는 등 일부러 힘든 경험을 하게 해서 단결심과 애사심을 키우려고 한다. 번역책이라서 원래 단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미덕이니 영예니 하는 것도 결국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서만이 나타나는 것 아닌가? 말이 좋아서 그렇지 그것도 알고보면 단지 자존심이나 질투심의 다른 이름 아닐까? 


저자는 이와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주장을 통해 공동체의 미덕과 영예를 지지하는데, 공동체와 미덕과 영예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고 어떤 과정으로 생성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없다. 좀 더 쉬운 말로 표현할 수는 없을까?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이상? 가치관? 아니면 문화? 공동체는 때때로 잘못된 길로 나아가 인종주의, 전체주의, 파시즘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특히 종교적 공동체들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수많은 전쟁을 일으켰다. 역사상 수많은 공동체는 힘없는 개인들을 억압해왔다. 나는 이렇게 힘들고 불행한데 도대체 이 놈의 공동체는 누구를 위한 공동체인가? 에 대한 물음에서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라는 개념이 싹튼 것 아닌가? 특히 옛날 시골 사람들은 공동체 의식이 강한데, 모든 일들이 나이 많고 권력을 쥔 어른들 뜻대로 돌아가고 어리거나 힘없는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한다며 치를 떠는 사람도 많다. 어릴 때 고향인 시골을 떠나 도시로 온 사람들은 맨날 동네 어른들 행사나 잔치에 끌려다니며 일만 했는데 그렇다고 따뜻하게 대해주지도 않았다며 넌더리를 내기도 한다. 옛날엔 눈감으면 코베어간다며 서울이 무서운 곳으로 비춰졌지만, 요즘엔 오히려 시골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을 묻어버릴 수 있는 무서운 곳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 사람들에겐 이래저래 공동체에 대한 아픈 기억이 아름다운 추억보다 더 많은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을 공동체와 떼어놓고 생각하려는 때가 많다. 그 예로, 과거 조상들이 저지른 잘못을 그 후손들이 대신 사죄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다루었다. 독일 나치와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 미국의 흑인 노예 등 여러가지가 있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은 내가 저지른 죄도 아닌데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이 있다는 건가? 라며 사과하거나 보상하기를 거부한다. 이른바 도덕적 개인주의인데, 저자는 이에 대해 개인의 정체성과 공동체의 관계, 합의와 의무와 관련하여 자유주의 이론과 아리스토텔레스 이론, 그리고 매킨타이어의 공동체주의를 살펴보며 이어서 연대감, 소속감, 애국심까지 다룬다. 이를 통해 저자는 개인과 공통체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평소에 애국심이라고 하면 그게 뭐지 개가 뜯어먹는 풀인가? 하다가도 일본에서 과거 만행과 죄악을 부정하면서 오히려 뻔뻔하게 한국을 거짓말쟁이로 몰고 그것도 모자라 땅까지 뺏으려는 것을 보면 화를 참을 수 없다. 하지만 일본 축구 대표팀과 한국 축구 대표팀이 경기할 때는 별 관심이 없다. 뉴스를 보면 한숨이 나오며 도대체 이 나라는 누구를 위한 나라인가 싶을 때도 있고, 살다보면 한국인으로 태어난 게 원망스럽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다면 난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이 없는 것일까? 어쩌면 일본의 태도에 화가 나는 건 한국인이라는 것과는 상과없이 그저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이나 기타 테러리스트들의 자살폭탄을 볼 때는 그저 왜들 저러지, 하면서 약간의 안타까움만 잠시 스쳐갈 뿐 분노까지 느껴지지는 않는다. 유독 일본에 대해서만 분노가 느껴진다. 일제시대 배경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친일파 중엔 원래 부자였던 사람들도 있지만 천대받고 살았던 노비들도 있다. 실제로 친일파들이 주로 어떤 계층이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만약 가진 자였다면 가진 것을 보호하기 위해 배신했을테고, 없는 자였다면 가지기 위해서 배신했을 것이다. 반면 이회영 형제와 같이 갑부였으면서도 가족까지 희생시키고 온 재산을 털어 독립 운동에 쓰고 쓸쓸히 죽어간 사람들도 있다. 개인과 공동체를 단지 자율적인 합의에 의한 계약적 관계로만 본다면, 친일파들은 합리적인 사업가이며 독립 운동가들은 바보 멍청이들일 뿐, 우리는 그 어떤 분노도 감동도 느끼면 안된다. 그런데 정말 그래야 할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공동체란 참 애매한 말인 것 같다. 부부도 공동체다. 가족도 공동체다. 더 나아가 학교, 마을, 회사, 그리고 국가도 공동체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단순한 개인의 집합이 아니다. 더 작은 단위의 공동체가 모인 것이고, 개인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공동체에 동시에 속할 수 있다. 작은 공동체 또한 여러 개의 더 큰 공동체에 동시에 속할 수 있다. 사람은 좋든 싫든 그 여러 공동체들 속에서 엄청나게 복잡하고 수많은 관계를 맺고 갈등을 겪으며 자아를 형성한다. 어쩌면, 공동체는 단순히 개인이나 더 작은 공동체들이 모인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닌...뭐랄까...확장된 자아일 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개인은 공동체를 떠나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인의 정체성이 생성되는 근원은 공동체이다. 만약 전혀 다른 공동체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면 지금의 나와 완전히 똑같은 정체성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는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는 정의를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공동선을 고정된 어떤 것으로 보는 것은 아니고, 니코마쿠스 윤리학에서 인용한 말처럼 늘 변화하며 비판 가능한 것으로 보는 것 같다.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정의나 개인의 권리에 대해 말할 때 공동체를 떠나 중립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적극적으로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서로 다른 주장을 기꺼이 수용하는 문화를 만들어 나가자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사회는 편협하고 배타적인 도덕주의로 흐르기 쉬워지고 자유주의자들이 건드리기 두려워하는 곳에는 근본주의자들이 몰려들어 시민의 삶이 저하된다고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공동체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공동체가 아니다. 독특한 정체성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도 함께 존중받는, 기존 전통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비판과 변화를 수용하는 공동체이다. 그는 우리가 그런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며 그 고유의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서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치를 제안한다. 그 길로 우리를 이끌 정치적 담론으로 시민 의식, 희생, 봉사, 시장의 도덕적 한계, 불평등, 연대, 시민의 미덕, 도덕적인 참여 정치를 들었다. 이 중에서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도덕적인 참여 정치인 것 같다. 그는 좋은 삶에 대한 논의를 서로의 삶을 침해하고 간섭하는 행위로 여겨 금기시하고 회피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진심으로 이해하려하지 않는 피상적인 존중일 뿐, 오히려 오해가 쌓여 반감이나 분노를 유발하고 공개 담론의 질을 떨어뜨리며 남의 거짓말에 쉽게 흔들리게 된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공적 생활에서 드러내는 신념을 피하기보다는 도전하고 경쟁하고 경청하고 배우면 상호 존중의 기반을 더욱 굳건하게 할 수 있으며 정의로운 사회 건설에 더 유익한 기반을 제공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할 수만 있다면 참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말인 것 같긴 한데, 요즘같이 혐오가 하나의 삶의 방식처럼 되어버린 세상에서 어떻게 서로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싶다. 어쩌면 우린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가짐을 잃어버리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일 지도 모르겠다. 과거 민주주의를 위해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의 책을 읽고 토론하며 함께 싸웠던 젊은이들이 이제는 그들이 한 때 맞서 싸웠던 자들과 똑같은 모습이 되고, 현재의 젊은이들은 시험 문제집을 들고다니며 먹고 살 걱정에 다른 걸 신경쓸 겨를이 없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위기의 순간 촛불을 들고 다 함께 모여 보여준 그 저력으로 새로운 대화의 세상을 열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책을 읽는 동안 계속 상상했던 것이 있다. 동양철학으로 접근하면 어떤 이야기들이 나올까? 고등학교 시절 허무주의와 염세주의에 빠지기도 했고, 노자와 장자에 대한 책이나 오쇼라즈니쉬의 책을 읽기도 하고 법구경도 읽는 등 동양철학에 관심이 있었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별로 남는 게 없다. 동양철학의 사고방식이 좀 생소하고 그 내용도 어려운데다가 현대 사회에 적용하여 삶의 가치관으로 삼기에는, 어떻게 보면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어 그런 것 같다. 어릴 때여서 더 그랬던 것 같기도 한데, 지금은 어떨까? 그 때보단 좀 더 이해가 가려나? 동양철학 책들도 읽어봐야겠다. 



● 목차


01. 정의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문제일까?

복지, 자유, 미덕

어떤 부상을 입어야 상이군인 훈장을 받을 자격이 될까?

구제 금융에 대한 분노

정의에 대한 세 가지 접근법

사례 1 : 복주하는 전차

사례 2 : 아프가니스탄의 염소 목동

도덕적 딜레마

02. 최대 행복 원칙 : 공리주의

제러미 밴담의 공리주의

거지를 한 곳에 몰아넣기

반박 1 : 개인의 권리

기독교인을 사자에게 던지기

고문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행복한 도시

반복 2 : 가치를 재는 단일 통화

폐암의 이익

폭발하는 연료 탱크

노인의 목숨값 할인 계산 논란

고통의 대가를 계량하는 실험

도덕적 행위를 계량하려는 시도

존 스튜어트 밀

자유 옹호

고급 쾌락

셰익스피어 대 심슨 가족

03.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유하는가? 자유지상주의

최소 국가

자유 시장 철학

마이클 조던의 돈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유하는가?

반박 1 : 과세는 강제 노동만큼 나쁘지 않다.

반박 2 : 가난한 사람에게는 그 돈이 더 절실하다.

반박 3 : 마이클 조던 혼자서는 경기를 할 수 없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성공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반박 4 : 조던의 의사에 반하여 그에게 세금을 부과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는 민주 사회 시민으로서 자신이 따라야 할 세법 제정에 의견을 낼 수 있다.

반박 5 : 조던은 행운의 덕을 봤다.

장기 거래

안락사

합의하에 이루어진 식인 행위

04. 대리인 고용 : 시장 논리의 도덕성 문제

징집과 고용, 어느 쪽이 옳을까?

모병제를 옹호하는 주장

반박 1 : 모병제는 공정하거나 자유롭지 않다.

반박 2 : 모병제는 시민의 미덕과 공동선을 해친다.

돈을 주고받는 대리 출산의 사례

대리 출산 계약과 정의

반박 1 : 합의에 결함이 있다.

반박 2 : 여성의 출산 능력은 사고팔 수 없는 고귀한 것이다.

외주 임신

05. 동기를 중시하는 시각 : 이마누엘 칸트

칸트의 권리 옹호

칸트가 지적한 행복 극대화의 문제점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사람이 사물과 다른 이유

도덕이란 무엇인가? 동기를 살펴라

타산적인 가계 주인과 '거래개선협회'

자신의 생명을 보존할 의무

도덕적인 인간 혐오자

철자 맞히기 대회 영웅

도덕의 최고 원칙은 무엇인가?

정언 명령 vs. 가언 명령

정언 명령 1 : 당신의 의지의 준칙을 보편화하라.

정언 명령 2 :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

칸트가 생각한 도덕과 자유의 관계

칸트 철학에 대한 질의응답

섹스, 거짓말, 정치

자유로운 성관계에 반대한 칸트의 견해

살인자에게 거짓말을 하면 잘못일까?

칸트라면 빌 클린턴을 변호했을까?

칸트가 생각하는 정의

06. 평등을 강조하는 시각 : 존 롤스

계약의 도덕적 한계

합의만으로 충분치 않은 경우 : 야구 카드와 물이 새는 변기

합의가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은 경우 : 흄의 집과 고무롤러맨

이익인가, 합의인가? 샘의 자동차 수리

완벽한 계약 상상하기

정의의 두 가지 원칙

임의적 요소 배제하기

평등주의 악몽

반박 1 : 포상은 재능 개발에 대한 장려금이다.

반박 2 : 포상은 노력에 대한 대가다.

도덕적 자격 거부하기

인생은 불공정한가?

07. 소수 집단 우대 정책 논쟁 : 권리 vs. 자격

찬성 의견 : 소수 집단 우대 정책은 시험 격차를 조정한다.

찬성 의견 : 소수 집단 우대 정책은 과거의 잘못을 보상한다.

찬성 의견 : 소수 집단 우대 정책은 다양성을 증대시킨다.

인종별 우대 정책은 권리를 침해하는가?

인종 분리 정책과 반유대인 쿼터제

백인 우대 정책도 가능할까?

정의와 도덕적 자격을 분리할 수 있을까?

대학이 경매로 입학생을 뽑아도 될까?

08. 정의와 도덕적 자격 : 아리스토텔레스

정의와 텔로스, 영예의 관계

목적론적 사고의 예 : 테니스 코트 사용 권리와 <곰돌이 푸>

대학의 텔로스는 무엇인가?

정치의 목적은 무엇인가?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행동으로 배우는 미덕

정치와 좋은 삶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제 옹호

케이시 마틴의 골프 카트 논쟁

09.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의무를 지는가? : 충성심의 딜레마

사과와 손해 배상

조상의 죄를 우리가 속죄해야 할까?

도덕적 개인주의

정부는 도덕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가?

정의와 자유

공동체의 요구

이야기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합의를 넘어서는 의무

연대와 소속

가족의 의무

프랑스 레지스탕스

에티오피아 유대인 구출 작전

애국심은 미덕일까?

국경 순찰

'미국산 애용' 운동은 불공평한가?

연대는 자시 사람만 챙기는 편애일까?

충성심이 보편적 도덕 원칙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로버트 리

형제를 지키는 사례 1 : 벌저 형제

형제를 지키는 사례 2 : 유나바머

정의와 좋은 삶

10. 정의와 공동선

중립을 향한 열망

낙태와 줄기세포 논란

동성 결혼

정의와 좋은 삶

공동선의 정치

1. 시민의식, 희생, 봉사

2. 시장의 도덕적 한계

3. 불평등, 연대, 시민의 미덕

4. 도덕적인 참여 정치

해제 : 공동체의 사람들을 위한 정의의 길 - 김선욱

작가소개

도서정보

특별 부록 해설

공공 철학자 마이클 샌델 - 이현우

<정의란 무엇인가> 에 나타난 문제 의식 - 정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