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에 대한 반론
이 책의 주제 자체는 다소 진부하다. 사실 다루는 사례들도 그다지 새로울 것은 없다. 대통령 생명윤리 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한 것이 계기이기 때문인지 생명공학 문제만 다루는데, 그 범위를 더 넓혔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생명공학 뿐만 아니라 인공지능, 로봇공학 기술이 인간을 위협하는 내용의 소설이나 영화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다. 그런 창작물 중에는 인조인간이나 로보트가 우월한 힘과 지능으로 반란을 일으켜 세상을 지배하고 인간을 학살하며 노예로 삼는 것에 대항하여 인간 영웅이 앞장서서 인간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내용이 많다. 그것은 인간의 오만함과 자만심에 대한 비판이며, 인간은 결코 완벽한 것을 창조하거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반대로 완벽한 기술이 만들어낸 섬뜩한 세상을 상상하는 사람들도 많다. 인간과 똑같이 생기고 스스로도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인조인간이나 복제인간이 자신을 창조한 잔혹한 인간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고 도망치거나 저항하는 스토리가 그렇다. 그런 것들을 보면 도대체 인간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또한 인간이 존중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유발하라리는 <호모데우스> 에서 생명공학 기술 발달로 소수의 사람들이 초인간으로 업그레이드되어 인공지능 알고리즘으로 열등한 호모 사피엔스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세상을 그렸다. 만약 인간이 정말로 신처럼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지금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 다른 존재가 될 것이며, 그들 또한 우리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저자는 생명공학과 유전공학 기술이 선보이는 놀라운 사건들을 보고 거부감과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며 그 이유가 무엇일지 묻는다. '인간 업그레이드' 에 대한 불안감은 그 대신 무엇을 잃게 되는가, 그리고 잃게 될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것을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샌델이 다른 책들에서도 한결같이 호소하는, 바로 공동체와 인간의 가치이다. 어찌할 수 없는 위대하고도 두려운 자연과 운명의 힘 앞에서 인간은 삶을 주어진 선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그 짧은 인생을 더욱 풍부하고 소중하게 만들어주는 여러가지 가치들을 깨우치고 지켜왔다. 겸손, 감사, 사랑, 연대, 책임, 도전, 의지, 용기, 노력 같은 것들 말이다.
저자가 생명공학과 윤리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은 '마음의 습관' 과 '존재의 방식' 이다. 선택하지 않은 것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재능과 능력과 노력에 찬사를 보내는 것, 행운에 대한 겸손과 감사하는 마음, 나누며 더불어 사는 삶 같은 것들이다. 제한없는 생명공학 기술 개발은 그런 것을 위협한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 업그레이드' 기술로 우리의 본성을 버리고 바꾸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힘과 자율권을 잃어버리는 행동이라고 경고하며 불완전한 인간의 능력과 한계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치료 목적의 기술이나 줄기세포 연구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인간 고유의 능력과 본성을 회복하는 것에는 찬성하지만, 그것을 넘어서 인간을 개조하거나 창조하는 것에는 반대하는 입장인 것이다. 특히 독일 철학자 하버마스를 인용한 부분이 재미있다. 우리는 그 본질상 우리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와 관련해서 자신의 자유를 경험하므로, 스스로 자유롭고 자기 삶의 온전한 주체자라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기원을 타인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신이나 자연과 같은 시초에 둘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전자 개량의 역사는 인류가 정착하여 농부가 된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안정적인 식량 생산과 공급을 위해 열매나 씨앗이 크고 많은 개체들을 따로 골라내서 번식을 시키는 식으로 말이다. 우리나라 시골 농부들도 몇십 년 전만해도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종자로 농사를 지었는데 집집마다 개량해온 방법이 똑같지는 않아서 그 종자 역시 조금씩 달랐다고 한다. 때로는 정부에서 주도하여 수확량이 많고 병충해에 강한 품종을 개발해서 농가에 보급하기도 한다. 이제 유전자 연구는 과학자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유전자 조작/변형 식품은 이미 인류를 먹여살리는 주식이 되었다. 몬산토 같은 세계적인 초국적 GMO 기업들은 밀 뿐만 아니라 옥수수, 콩, 바나나 등을 정복했고, 이제는 벼를 목표로 하고 있다. 머지않아 GMO 벼로 지은 쌀밥이 우리 식탁에 오를 것이다. 그렇게 기업들이 '창조한' 종자는 수확량이 어마어마하지만, 스스로 씨를 만들어내지 못해서 번식을 할 수 없다. 또한 계획적으로 특정한 농약에만 강하게 만들어서 그 농약만 써야 한다. 어떤 기업은 단백질로 소고기나 돼지고기 같은 것을 실험실에서 배양하는 연구까지 하고 있다고 한다. 동물 역시 가축화되면서 개량되어왔다. 인간 역시 핏줄과 족보를 따지는 것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다. 유전자의 존재를 알기 전부터 인류는 번식을 통해 생명체를 개량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또 그렇게 하며 살고있었던 것이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고 또 남들보다 더 강해지는 것은 인류의 오랜 꿈이다. 인류가 멸망하지만 않는다면 언젠가 스스로의 유전자를 개량하고 진화하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그렇지만 영화 속 상상의 세계에서 선보이는, 인간을 복제하거나 창조하는 수준까지는 생명공학이 갈 길이 한참 멀어 보인다. 연구 개발에 필요한 돈이나 시간의 문제보다는 종교, 정치, 문화적인 반발이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다. 아마도 생명공학보다는 인공지능과 로봇공학이 훨씬 먼저 인류의 삶에 큰 변화를 일으킬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알파고 사건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인공지능 발달로 수많은 직업들이 사라질 거라며 벌써부터 걱정했다. 운전기사 뿐 아니라 변호사나 의사 같은 전문직도 인공지능에 의해 사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방대한 지식 습득, 정확한 기능 수행, 빠른 상황 판단 능력이 필요한 일은 사람보다 인공지능이 훨씬 잘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 육체 노동에서 전문 기술직까지 인간이 인공지능과 로보트보다 잘 할 수 있는 일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어쩌면 판검사도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지도 모른다. 아마 인공지능을 유지보수하는 직업과 더불어 마지막까지 인간이 지켜내는 직업은 국회의원 같은 정치인 정도밖에 안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인공지능을 개발하고 관리하는 직업이 더 많이 생길 것이므로 일자리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 말에 또 다른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의 적성이나 성향이 IT에 맞는 것은 아니라며 반박하기도 했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은 과거 산업혁명이 소나기 정도에 불과했다면 인공지능은 쓰나미를 동반하는 태풍 수준이 될 거라며 여지껏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대격변을 예상하기도 했다. 고민이 많은 사람들은 그래도 예술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라며 애써 스스로를 위안하려 했지만, 인공지능이 신문기사를 쓰고 작곡도 했는데 전문가들조차 사람과 인공지능의 창작물을 구별할 수 없었다는 기사들이 떴다. 인공지능과 음성인식 기술은 날로 발전하여 간단한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많은 학생들이 사람인줄만 알았던 인공지능 대학 조교 질 왓슨 이야기도 유명하다. 아마존은 예절 교육과 사회성 발달을 걱정하는 부모들을 위해 어린이용 알렉사에 'Magic Word' 기능을 개발했는데, 아이가 명령하면 알렉사가 "What's the magic word?" 라고 되물으며 "please" 라고 말하며 부탁하도록 유도한다고 한다. 이제는 인공지능이 아이들 예절 교육도 시킨다. 와우, 인간 부모보다 낫다. 이런 이야기들이 장난 같기도 하지만, 세계 최초의 컴퓨터가 언제 발명되었는 지를 생각하면 그 발전 속도가 장난이 아니다. 경제력만 뒷받침 된다면 영화 속 이야기들이 정말 백년 안에 이루어질 것만 같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의 근본적인 이유는 일자리가 아니다. 인간으로서 가치를 느끼게 해주는 고유의 능력, 지식, 학습, 노력, 노동의 가치가 모두 보잘 것 없어지고 그 결과 인간의 정체성이 위협받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로보트가 우리보다 운전을 더 잘 하거나 어렵고 힘들고 위험한 일을 더 잘한다는 건 그렇다고 치자. 인공지능이 우리보다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까지도 양보한다고 치자. 하지만 더 재미있는 소설을 쓰고, 더 감동적인 그림을 그리고, 더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하기까지 한다면, 더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감각과 생각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면, 그렇게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인간다워지면, 우리는 정말 스스로가 하찮게 느껴질 지도 모른다. 만약 사람이었다면 선망과 인기의 대상이 되었을 그런 멋진 인공지능 로봇의 충성스러운 시중을 받으며 놀고 먹는다고 해도 그런 삶이 전혀 즐겁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세상에서 인간이 무언가를 생산하고 창조하는 것은 비효율적인 바보 짓이 되어버리고, 오직 소비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게 될 것이다. 그런 삶이 보람있고 재미있을 수 있을까?
어쩌면 생명공학의 시대가 오기 전에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영화 매트릭스 같은 세상이 올 지도 모른다. 생명공학의 발전이 더 이상 필요없는 세상 말이다. 환상적인 가상 현실 세계에서 깨어나지 않고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완벽한 육체가 굳이 필요한 이유가 뭐란 말인가? 만약 그게 싫다고 한다면 역시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영화 매트릭스의 세상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파란약을 먹어야 한다. 만약 빨간약을 먹어야겠다는 사람들이 있다면 인간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고 어떤 삶을 인간의 삶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생각을 해봐야 한다. 나의 육체는 나인가? 영혼이 있는가? 작은 세포에서 아기로 자라나 세상과 소통하며 서서히 인격과 의식을 형성하고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라면, 가상 세계에서 의식이 형성된 인간은 인간이 아닌가? 무엇이 나인가? 진정한 나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런 나로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꼭 인간일 필요가 있는가?
그런 생각들을 하다보면 결국 육체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사람이 영혼과 신을 믿고 내세를 믿어왔던 것도 나약한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 더 오래 살고싶은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우리 몸은 단순한 껍데기에 불과한 것일까? 팔다리가 없어도 사람이라는 것은 모두 동의할 것이다. 인공 심장을 이식한 사람도 사람이다. 기계부품으로 대체해도 여전히 우리가 인간으로 남을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하나씩 없애고 나면 아마도 마지막에 뇌가 남을 것이다. 그렇게 육체와 연결되었을 모든 뇌신경을 반도체 회로와 연결하여 뇌만 남기고 온 몸을 기계로 대체한다면 정말 그것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래야 한다면 실험실에서 배양한 단백질 덩어리로 완벽한 육체를 창조하여 뇌를 심는 것도 인간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 뿐 아니라 사람 뇌를 소나 개나 너구리에 이식해도 인간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렇다고 뇌가 곧 나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그 안에 영혼이라도 담겨있는 걸까? 글쎄. 과학의 발달로 의식과 지능과 감정이 약물로도 조정 가능한 뇌 신경의 화학 작용에 불과한 것이라는 밝혀지고 있다. 물론 그런 연구 결과가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인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점점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게 되었다. 명실상부한 유물론의 시대라고 부를만하다.
그렇다면 인간이 되기 위해서 꼭 뇌를 있는 그대로 보존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의식을 담고있는 뇌 신경의 단백질 구조와 화학 반응 그대로를 전기 신호로 변환하여 컴퓨터 기억 장치에 업로드해서 원래의 인간과 똑같이 생각하고 말하고 세상과 소통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도 인간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인간과 똑같이 인격과 의식과 지능이 있다면 순수하게 창조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인간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반드시 유성 생식을 통해 수정을 하고 몇 개월이라도 엄마 뱃속에 있다가 나와야만 인간인가? 인간이라 부를 수 있기 위해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든 가능한 완벽한 기술의 시대를 상상한다면 이처럼 어처구니 없더라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혼란을 피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적어도 아직까지 사람들은 자기 정체성의 상당 부분을 육체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며 형성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육체를 통해 느끼는 감각과 경험들은 정체성 형성의 중요한 배경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의 차이는 단지 겉모습의 차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의 차이를 낳는다. 당장 얼굴만 달라져도 마치 자신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고 정말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곤 하지 않는가? 기술이 발달하고 환경이 변화하면 사람들의 경험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에 따라 세대가 지날수록 생각의 격차가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생명공학으로 우리 몸을 변화시키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가 될 수 있다. 기존의 모든 외부 자극을 육체가 전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환경이 한꺼번에 전부 변화하는 것과 같다. 생명공학이 인간을 개조하기 시작하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변화와 갈등이 발생할 것이다.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날 때 느끼는 충격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문화는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개성이나 가치관의 문제로 다룰 수 있지만, 생명공학으로 개조되고 진화하기 전과 후의 인간들끼리는 그러기가 매우 힘들 것이다.
사람들은 여태까지 알고있던 세상과 전혀 다른 세상에 고립되면 자신의 정체성이 불분명해지는 혼란을 느낀다. 거침없이 앞을 향해 달려가는 생명공학, 인공지능 같은 과학기술들에 막연하게나마 거부감과 불안감을 느끼는 진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존재의 의미를 가지기 위한 투쟁이다. 이런 고민들도 시간이 지나고 세대가 바뀌면 달라질 것이다. 매일 매일 볼 때는 어제와 똑같은 얼굴인 것 같은데 몇십 년 전의 얼굴을 보면 완전 달라져 있듯이, 그렇게 세상이 조금씩 변화한다면 언젠가 인류는 지금의 우리와 전혀 다른 것이 되어있을 지도 모른다. 그 때가 되면 지금 우리가 걱정하는 모든 것들이 전혀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는, 마치 숨을 쉬고 물을 마시는 것처럼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모든 변화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분명 혼란 속에서 방황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도 이런 책을 읽고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을 해야 하는 이유는, 혹시라도 적응할 틈도 없이 불시에 그런 급격한 변화로 세상이 낯설어지더라도, 중심을 잃거나 길을 잃지 않고 떳떳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 삶을 산 사람들이 있었다는 흔적은 언젠가 어떤 날에 또 다른 문제로 방황하는 신인류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 목차
01. 강화의 윤리학
불안감의 근원
유전공학
근육 강화
기억력 강화
신장 강화
성별 선택
02. 생체공학적 운동선수
스포츠의 이상 : 노력인가, 재능인가
경기력 강화의 수단 : 하이테크와 로테크
스포츠 경기의 본질
03. 맞춤 아기를 설계하는 부모
틀에 맞추기와 있는 그대로 지켜보기
성과에 대한 압력
04. 우생학의 어제와 오늘
과거의 우생학
자유시장 우생학
자유주의 우생학
05. 정복과 선물
겸손과 책임과 연대
반론에 대한 반론
정복을 위한 프로젝트
에필로그 - 배아 윤리학 : 줄기세포 논쟁
줄기세포 연구에 뒤따르는 문제들
복제 배아와 여분의 배아
배아의 도덕적 지위
해제 - 생명공학 시대와 마음의 습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