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돌이 2021. 2. 2. 23:45

복제인간이나 인조인간 또는 로보트에 사람의 기억을 심거나 조작하는 것은 영화나 만화에서 꽤나 자주 접할 수 있는 소재다. 기억을 심거나 조작하는 장면을 보면 대부분 비슷한데, 기껏해봐야 4~5 초 정도 되는 동영상 또는 거의 스틸 컷과 다름 없는 장면들을 어찌어찌하여 뇌에 집어넣는다. 그것도 초점이 잘 맞지 않거나 흔들리고, 소리도 메아리치고, 중간 중간 맥락없이 끊기는 빛바랜 장면들이다. 언뜻 생각없이 보면, 과연 그런 영상의 조각들로 과거를 창조하는 게 말이나 되나? 싶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실제로 내가 어떤 과거를 기억해낼 때 머리 속에 떠오르는 흐릿한 이미지는 영화 속 그것과 비슷하다! 완전 CCTV 같은 기억도 없지는 않다. 전세계적으로 100명 정도밖에 없다는 과잉기억증후군에 걸린 탐정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그는 한 번 본 것을 절대로 잊지 않는다. 슬쩍 스쳐지나간 것도 의지와 상관없이 뇌에 영구 저장되어, 마치 컴퓨터에 저장한 사진을 보거나 동영상을 플레이하듯 아무리 오래된 것이라도 '꺼내 볼' 수 있는데, 그 기억 속 장면들을 클로즈업해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을 정도다. 그의 기억은 너무나 정확해서 사실 그 자체와 전혀 차이가 없다. 그 뿐 아니라 그 당시의 감정도 그대로 남아있어서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기억을 떠올리면 그 때 그 느낌과 감정이 생생히 되살아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과잉기억증후군에 해당하지 않는 절대 다수 사람들의 기억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인간은 기억하는 동물보다 망각하는 동물에 더 가깝다.

기억이란 것이 얼마나 형편없냐면, 기록으로 남은 사진이나 비디오를 보거나 혹은 다른 사람이 그랬었다 저랬었다 기억안나냐 하며 도와줘야 그 때서야 비로소 아! 그랬었지! 하면서 흐릿한 기억이 떠오르는 일이 매우 흔할 정도다. 사실은 그렇게 떠오르는 기억을 썩 믿을만 하지도 않다. 어릴 적 사진을 조작해서 그 사람들이 가본 적 없는 곳을 배경으로 합성해서 보여주었더니, 글쎄 그들이 경험하지도 않았던 그 곳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해냈다는 놀라운 연구가 있다! 사람들은 남의 경험을 보거나 들은 것을 자신이 실제로 경험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혹시 전 애인이랑 봤던 영화를 현 애인이랑 봤다고 착각하고 자기야, 그 때 우리 같이 본 그 영화 있잖아...그랬던 적이 한 번쯤은 있지 않나? 기억 속 장면들이 마치 꿈처럼 워낙에 띄엄 띄엄 뒤죽박죽이라, 잘못 연결되곤 하는 것이다. 데자뷰 현상도 어쩌면 그런 기억의 파편이 장난치는 것일 지도 모른다. 기억은 매우 불완전하고 취약하여 이처럼 왜곡되기 쉽다.

어쩌면 기억은 애초에 뇌에 저장될 때부터 왜곡되었을 지도 모른다. 현실의 사건이 전기신호인지 화학물인지 단백질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다른 형태로 '변환되어' 뇌에 저장되기 때문이다. 과거의 경험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들을 관찰해보자. 경험한 사실 그대로를 객관적으로 묘사하는가? 어떤 사람이 어떤 추운 날을 말한다고 치자. 추웠다는 것은 얼마나 객관적인가? 사람들은 자기가 얼마나 추위를 느꼈는지 기억하지, 섭씨 몇 도였는지를 기억하지 않는다. 만약 그 때 몇 도였다고 말한다면, 자신이 느낀 추위를 근거로 대략 짐작해서 말한 것일 수 있다. 과거 기억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이야기를 끝낼 것이다. "아 아무튼 그 때는 진짜 그랬다니까!" 그렇다. 사람은 실제 있었던 일보다, 그 때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더 잘 기억한다. 기억은 당시에 그 사람의 성향이나 가치관 또는 입장에 따른 주관적인 평가와 해석이 섞여서 저장된다는 얘기다. 

주관적인 평가나 해석이 추가되는 것은 기억이 재생될 때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이 가난했던 과거의 시절을 얘기한다 치자. 그 가난함이란 그 당시에 다른 사람들보다 가난했다는 뜻인가, 지금의 자신과 비교해보니 가난했다는 뜻인가? 그 때 모두가 다 똑같이 가난했다면 그 당시에도 스스로 가난했다고 생각했을까? 가난은 상대적인 개념이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다. 누군가가 가난하냐 아니냐 그 평가 기준은 시공을 초월할만큼 다양할 수 있다. 1950년대에 집에 TV 가 있었던 사람이라면 그 당시에는 엄청난 부자였겠지만, 지금의 중산층과 생활수준을 비교해보면 오히려 가난하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만약 그 사람이 그 때를 떠올리며 "그 때 우리집은 참 가난했지!" 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개소리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심리학에서는 이렇게 실제 있었던 일과 사람들의 기억이 다른 이유를 '경험하는 자아' 와 '기억하는 자아' 라는 말로 설명하기도 한다. 

기억은 의도치 않게 의도적으로 왜곡될 때도 있다. 사람들은 말을 할 때 설명을 위해 비유하거나 은유적인 표현을 쓰기도 하고 극적인 효과를 노려 과장하거나 양념을 치기도 하는데, 그렇게 한 얘기가 원래 기억을 덮어쓰고 실제 일어난 일처럼 기억되기도 한다. 흐릿한 기억이 말로 표현되면, 그 말이 실제 기억인 것처럼 착각하고, 그 착각을 근거로 과거가 재구성되는 것이다. 이런 거다. "맞아! 그 땐 그랬어! 왜냐하면 내가 이전에 그 땐 그랬다고 말한 적이 있거든! 그러니까 그 땐 그랬던 거지!" 기억은 자꾸 떠올리거나 말할수록 그런 과정을 거쳐 알게 모르게 점점 변해간다. 어떤 시기나 사람에 대한 특정한 기억이 반복적으로 소환되면 그것이 점점 강화되어 전반적인 기억이 편향되고 극단적으로 단순화 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기억은 소문과 비슷하다. 어릴적 친구들을 만나 싸움 좀 했던 학교 짱 얘기를 하다보면 그 지역을 휩쓴 전설의 파이터가 되어있고, 또래들한테 인기 좀 있었던 어떤 여자애는 그 일대 모든 남자들 눈을 멀게 한 절세의 미녀가 되어있다. 공부 좀 했던 어떤 친구는 세상 천재가 되어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 내가 그렇게 생각했던 기억은 없다. 그런데 나는 어느 새 '맞아! 그랬어!' 하면서 친구들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있는 것이다. 계속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내가 진짜로 당시에도 그렇게 생각했었다고 기억하게 될 지도 모른다.

세대 차이와 갈등 이면에는 왜곡된 기억이 있다. 사람이 나이가 들고 세대교체가 되면 입장이 달라진다. 입장이 달라지면 사람이 달라진다. 하지만 사람은 한결같은 일관성을 좋아하기 때문에 평소 생각해왔던 자신과 실제 느껴지는 자신이 다르면, 즉 '인지부조화' 를 느끼면 불편해 한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자신이 달라서 불편하다면, 그 변화가 불가피한 이유를 들어 현재를 정당화하거나, 과거의 기억을 현재에 맞게 변형시키거나 부정할 수 밖에 없다. 아무래도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것보다는 기억을 편집해 자신을 속이는 게 더 쉽다. 20년 넘게 사람들의 정치 성향을 장기간 추적 조사한 어떤 연구에 따르면, 젊었을 때 진보 정당을 지지한다고 밝혔는데 나이든 후 보수 정당을 지지한다고 말한 사람들에게 과거에는 어땠냐고 물어봤더니, 옛날에 자기가 진보 정당을 지지한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젊었을 때부터 쭉 보수 성향이었다고 대답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젊었을 때 했던 무모한 짓들을 똑같이 반복하는 젊은이들에게 공감하지 못하고 손가락질 한다. 자기가 젊었을 때 손가락질하며 비난했던 비열한 꼰대들의 추악한 짓거리들을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정당화하고 똑같이 저지르며 산다. 젊은 세대들이 나이가 들면 그렇게 꼰대가 된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다. 

간혹 너무나 생생하고 뚜렷하게 남는 기억이 있기도 하다. 섬광기억이라고 하는데, 정서적으로 큰 충격이나 인상을 받았을 때 아주 디테일하게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경우가 그런 예다. 기억하는 내용이 상세할수록 정확하다는 인상을 받게된다. 듣는 사람은 우와! 그런 사소한 것까지 다 기억난단 말야? 그렇다면 저 사람 말이 사실인가보군!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디테일한 기억은 오히려 조작의 흔적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 각자의 기억이 대단히 디테일하지만, 바로 그 디테일한 부분에서 서로의 기억이 대단히 불일치한 경우가 흔하다는 것이다. 때로는 대단히 중요한 부분에서 기억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충격적인 범죄 현장 목격자들이 범인의 인상착의에 대해 저마다 다르게 진술하는 경우가 있는데,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 혹은 백인이었는지 흑인이었는지 따위가 다를 때도 있다고 한다. 오히려 섬광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기억에 대한 믿음이 워낙에 확고하여, 실제 기록된 당시 사진 등을 보여주며 '당신이 잘못 기억하고 있다' 고 알려줘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한다. 법정에서 여러 증인들의 증언이 서로 엇갈리거나, 유일한 증인이 잘못된 기억으로 증언하여 엉뚱한 사람이 억울하게 감옥에 가거나, 증거와 증언이 일치하지 않아 판결을 두고 분쟁이 발생하는 사례는 어렵지 않게 접해볼 수 있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보면 기억은 다큐멘터리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에 더 가깝다. 그 정도로 기억은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기억을 믿는 이유는, 지식에 대한 기억은 대체로 정확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람이 반복적으로 공부하며 익힌 지식은 거의 변형되지 않고 오래도록 정확히 기억된다. 그런 기억을 바탕으로 직업을 갖고 일도 하는데, 어찌 기억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지식에 대한 기억이 정확하다는 사실은, 거꾸로 개인적인 경험에 대한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지식은 인위적으로 특정한 내용을 반복적으로 학습하며 잘못된 기억을 계속 수정하고 고정시킴으로써 얻게된다. 하지만 특정한 시점의 경험은 반복할 수 없다. 시간은 한 번 지나가면 끝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첫뽀뽀가 그렇다. 그러므로 경험을 기억한다는 것은 마치 책을 딱 한 번 훑어보고 그 내용을 기억하는 것과 같다. 만약 자신의 경험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기록하고 일기를 쓰며 감정과 생각을 정리한 다음 그것을 반복적으로 확인한다면, 비교적 오랜시간 정확하게 왜곡 없이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공부할 때처럼 지금 이 순간을 꼭 기억하겠어! 하면서 의식적으로 주위의 것들을 기억에 담아둔다면, 어쩌면 그 때도 꽤나 오랫동안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초에 관찰하고 기억에 남기는 것이 경험의 목적이 된다는 것 자체가 인위적이며, 그 때문에 SNS 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일상처럼 기억하고자 하는 경험 자체가 조작되고 왜곡되고 말 것이다. 관찰이 결과에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하는 어떤 과학 이론처럼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러한 불완전한 과거 기억들이 그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여겨진다는 것이다. 복제인간을 소재로 하는 영화들의 흔한 스토리는 뭐 이런 식이다. 특수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복제인간들은 자신이 진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생생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사실은 이식된 다른 누군가의 기억이라는 것을 어느 날 우연히 알게 된 후 충격과 공포에 빠져버린다. 하지만 곧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인간들에게 반기를 든다. 기억상실증으로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인물도 흔한 소재인데, 그는 늘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난 누구지! 난 대체 누구란 말인가!" 또는 기억을 조작 당했다가 다시 원래 기억을 되찾는 스토리도 있다. 그런 인물은 진짜 나는 둘 중 누구인가? 하는 문제로 엄청난 혼란을 겪는가 하면, 그 경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을 배워 제 3의 자아로 발전되기도 한다. 이런 내용은 모두 사람은 과거 기억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에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는다. 

엉뚱하게 들릴 지 모르지만, 어떤 영화에서 기억을 마치 고장난 TV 속 영상이 뚝뚝 끊기는 모습으로 연출하는 것을 보고 문득 그것이 실제로 사람들이 기억을 떠올리는 형태에 가깝다고 느낀 후, 할 일이 없을 때 아주 가끔씩 내가 복제 인간이라는 상상을 하며 옛날 기억을 떠올려보곤 했다. 어떤 계기가 있어서 관련된 기억이 저절로 떠오르는 게 아니고 의식적으로 아무 기억이나 무작위 접근을 시도하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대부분 한 번이라도 떠올려본 적이 있는 기억이 다시 떠오른다. 한 번도 떠올려본 적이 없는 새로운 기억이 떠오르는 경우는, 음...거의 없다. 한 때 심리학과 인간 무의식 세계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일까? 자꾸 익숙한 기억만 떠오르는 게 어딘가 좀 불편했다. 내 기억이 뭔가 결핍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다채로움이나 풍성함 같은 게 느껴지지 않는다고나 할까? 마치 복제 인간이 된 것처럼? 그래서 본격적으로 내 기억을 탐구해보기로 했다. 내 기억 속으로 떠나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생각하는 기억 속 여행이란, 아련히 추억에 젖는 것과는 다르다. 아직 안개 속에 가려진 미지의 기억을 탐색하고 그 속에 숨겨진 나를 찾아내는 일종의 숨바꼭질이다. 물론 이미 고찰했다시피 내 기억들이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 사실 잘 떠오르지 않는 어렴풋한 기억이 있으면 한동안 그 기억에 매달리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지 않을 때는 앞 뒤 상황에 맞게 짜맞춰볼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에 게의치 않기로 했다. 어차피 그 기억이 진실인지 아닌지 증명할 길은 없으니까. 중요한 것은 흐름이다. 기억의 조각들이 조금씩 왜곡되었다 해도, 그 조각들이 모여 합쳐지면 각각의 왜곡이 서로를 보정해주어 어떤 그림이 그려질 것이라 기대한다. 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어떤 그림이 완성된다면 거기서 무언가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억의 조각을 모으는 것은 직소 퍼즐을 완성하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다. 직소 퍼즐을 푸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자리에 맞는 조각을 찾거나, 조각을 먼저 집은 다음 그에 맞는 자리를 찾거나. 어떤 한 곳에서 차례대로 하나씩 옆에 맞는 조각을 찾으면서 붙여나가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하다. 찾아야 할 조각이나 자리의 수가 줄어들수록 점점 남은 조각과 자리를 맞추는 시간이 빨라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일단 금방 맞출 수 있는 것부터 맞추고 애매한 부분은 나중으로 미루는 요령을 터득한다. 가장 쉬운 건 모서리 부분이다. 모서리 부분은 조각의 한 부분이 직선이므로 금방 찾을 수 있다. 모서리 부분을 다 맞추면 그 때부터 눈에 띄는 조각을 맞춘다. 완성 그림을 미리 분석한 다음, 특히 색깔이 튀는 부분을 찾아 그에 해당하는 조각을 찾거나, 반대로 특히 색깔이 튀어서 눈에 들어오는 조각을 집어 자리를 찾거나. 그 다음 금방 찾기 힘든 애매한 부분들은 비슷한 색깔이나 특징으로 구분하여 따로 모은다. 예를 들어 하늘과 꽃밭이 있다면 푸른 색 계열의 조각은 하늘일테고 초록색이나 알록달록한 것은 꽃밭 부분일테니까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조각을 구분하는 것이다. 하얀색은 구름일 수도 있고 꽃일 수도 있으니 그건 또 다른 그룹으로 구분한다. 만약 완성 그림에 빨간 직선이 있다면, 조각에서 빨간 직선 부분이 있는 것들을 따로 분리하여 모아둔다. 특정한 부분에 해당한다고 여겨지는 조각들끼리 따로 모아두면, 정확히 어느 자리에 놓아야 하는 지 아직 모르더라도 거기 있는 조각들끼리 맞추기는 상대적으로 쉽다. 그러면 한 개의 조각이 아니라 여러 조각이 모인 덩어리가 되므로, 전체 그림에서 어느 부분에 해당하는지 찾기가 더 쉬워진다. 그런 식으로 맞춰야 할 조각이나 자리의 후보들을 줄이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물론 빠른 눈과 관찰력과 기억력이 없으면 곤란하지만. 기억의 조각들도 그런 식으로 맞추면 된다! 일단 쉬운 것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