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거 아닌 생각

진보와 보수의 세계관

뻔돌이 2024. 4. 4. 08:43

갈수록 각종 이익 집단들과 언론 뿐 아니라 대통령까지 거들어서 국민의 분열이 가속화되고 일상화되는 가운데, 진보와 보수는 무엇이 다른가 다루는 글이나 영상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 그 차이 보다는 도덕적 우열을, 때로는 심지어 지능의 차이를 말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저쪽에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가능한가" 를 가지고 토론하기도 한다. 정말 진보와 보수를 옳고 그름으로, 혹은 정의와 불의로 구분하고 나눌 수 있는 것인가?

좌파니 우파니 진보니 보수니 하는 말들이 언제부터 왜 생겼는지는 잘 모른다. 200 여년 전 프랑스 혁명에서 시작된 거라는데 그 때의 그 의미와 지금의 그 의미가 같을까? 잘 모르겠다. 그저 스스로를 진보라 하거나 보수라 하는 자들의 언행을 관찰하여 그들이 어떤 집단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차이를 여러가지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런 차이가 왜 생기는지 이해할 수 있다면 자신을 돌아보고 어느 길로 가야할 지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왜 사람들은 각자 다른 가치관과 사상을 가지게 될까? 또 그런 가치관이 그대로 정치 성향에 반영이 될까? 사람의 가치관은 개인의 경험에 좌우된다. 태어나서 다른 사람들 속에서 자라고 이것 저것 보고 들으며 세상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인지한 후에야 가치관이라는 것이 생긴다. 말하자면, 사람의 가치관은 그의 세계관에 따라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세계관이 바뀌지 않으면 가치관이 바뀌지 않는다. 진보와 보수는 세계관이 무척 다르다. 

초등학생 자식을 키우고 있는 친구가 어느 날 술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요즘 젊은 애들이 점점 보수화되는 이유가 뭔지 아냐? 게임 때문이야" 그 친구의 주장에 따르면, 과거 우리들은 의례 인간의 성장 과정이 그러하듯 질풍 노도의 시기에 반항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봤지만 요즘 애들은 안그런다는 것이다. 요즘 애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모바일 게임에 (특히 MMORPG 와 같이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며 자신의 아바타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인)  흠뻑 빠져 있는데, 그렇게 어릴 때부터 게임의 룰에 익숙해진 결과 외부에서 주입된 룰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학습하게 되며, 그 결과가 보수화라는 것이다. 뭔가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했다. 요즘 애들이 주어진 룰에 수동적이진 않지 않나? 제멋대로인 건 우리가 애들이었을 때랑 비슷한 거 같은데...정말 게임이 보수적 정치 성향을 조장하는 모르겠지만, 그 때 그 친구의 말을 계기로 세계관에 대한 어떤 생각이 떠오르게 되었다.

보수 진영의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는 복잡한 부품으로 구성된 시계와 같은 거대한 기계 장치 또는 구조물인 것 같다. 크고 작은 톱니바퀴는 서로 제 자리를 지키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 움직여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시계가 멈추거나 고장난다. 사회는 그렇게 유지되고 돌아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각자에게 주어졌거나 혹은 자신이 선택한 역할에 충실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임금은 임금으로서 할 일이 있고, 신하는 신하로서 해야 할 일이 있으며, 그 선을 넘으면 안된다. 가정 내에서도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이 각자 역할이 있고 그 소임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부장적인 문화가 강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가지기 쉽다.


그런 세계관에서는 차별과 경쟁이 당연시 된다. 복잡하고 정교한 기계 장치라면 귀하고 대체 불가능한 부품이 있는가 하면, 흔하고 쉽게 대체 가능한 부품이 있다. 그러므로 부품의 중요도가 다르고 그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게 된다. 그와 같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은 중요하고 대체 불가능한 반면, 어떤 역할은 중요하지 않고 대체 가능한 것이 있다고 본다. 중요한 역할은 그에 맞는 능력과 자격을 갖추어야 하며, 그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자가 그 역할을 맡아야 하므로 경쟁을 통해 가장 걸맞는 자를 뽑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쟁은 바람직하고, 그에 따른 결과와 보상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생기는 차별은 정당한 결과이다.


이들이 볼 때 성적 소수자들은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하지 않으므로 위험한 존재다. 이들에게는 파업을 하고 시위를 하는 자들은 규칙을 지키지 않고 주어진 역할을 거부하기 때문에 사회를 고장내려는 위험한 존재다. 그러므로 국가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이 위험한 존재들을 관리하거나 처벌해야 한다. 또한 이들은 사회 계층이 섞이거나 움직이는 것을 싫어한다.  우수한 명품견은 똑같이 우수한 명품견과 짝짓기를 해야 역시 우수한 명품견 새끼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니까. 아무리 우수한 명품견이라도 잡종견하고 짝짓기를 하면 잡종이 태어난다. 우수한 혈통과 품질을 유지하려면 같은 것끼리 짝짓기해야 하는 것이다. 진돗개의 우수함을 보호하고 유지하려면 진돗개끼리 짝짓기를 하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들은 사회 계층을 섞으려는 국가 정책을 거부한다. 우수한 혈통이 보호되지 못하고 그 결과 부적합한 자가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면 사회가 무너지게 되니까.

반면 진보 진영의 사람들이 바라보는 세계는 꽃밭이나 정원 같은 것이다. 환경에 따라 그에 적응한 종들이 번영하고 그에 맞는 곤충이 모이고 그를 잡아먹는 동물들이 모인다. 다양한 형형색색의 식물과 곤충과 동물이 생기고 사라지고 적응하고 진화하며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세상이다. 좁고 한정된 공간에서 강한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게 그대로 내버려두면 나머지가 모두 도태되고 사라져버린다. 그러면 적응력이 떨어져서 환경이 급변했을 때 결국 모두 죽고 그 꽃밭은 사막이 되거나 잡초밭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환경에서는 다양성이 중요하다.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인위적인 국가 또는 사회적 차원의 간섭이 필요하다. 당장은 하찮은 약자더라도 보호해주어야 스스로 일어날 힘을 갖고 언젠가 사회를 구원하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작거나 크거나 예쁘거나 못생겼거나 모두 저마다의 가치가 있고 소중하고 평등한 존재인 것이다. 이들에게 성적 소수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딱히 피해를 끼치지 않는 그냥 다른 존재일 뿐이다. 이들이 볼 때 고용인과 피고용인은 서로 평등한 계약 관계일 뿐이므로 언제든 서로가 그 계약 내용 변경을 요구할 권리가 있는 것이고 파업과 시위는 협상 결렬의 결과일 뿐이다. 이들은 사회 계층이 섞이지 않고 고착화되는 것을 근친상간을 통한 번식과 같은 매우 위험한 것으로 본다. 소규모 집단 내에서 남매끼리 사촌끼리 짝짓기를 하면 그 결과 유전자가 열화되어 그 집단은 결국 멸종하게 되듯, 사회 역시 다양한 계층의 교류와 융합이 없으면 위태로워진다고 본다. 이와 같이 진보 성향의 사람들은 사회 계층이 섞여야 생존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때로는 정책과 법률로 이를 강제하려고 한다. 가부장적인 가정 환경에서 강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거나 자상하고 온화한 부모가 있는 사람들은 진보 성향을 가지기 쉽다.

보수가 볼 때 진보의 세계는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곳이다. 진보가 볼 때 보수의 세계는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곳이다. 같이 놓고 보면 그토록 다른 사람들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추구하는 가치들과 말들은 비슷하다. 양쪽 다 공정, 상식, 정의, 자유, 평등을 말하는데 실제로 그들이 받아들이는 의미나 정도는 사뭇 다르다. 예를 들어, 보수가 부르짖는 자유는 주로 국가와 규제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자신의 능력과 자원을 최대한 발휘할 자유가 최우선이다. 그러나 그 자유는 평등하지 않다. 자격을 갖춘 자들, 그러니까 더 중요한 역할을 맡은 자들의 자유가 더 보장받아야 한다. 그래야 시계가 멈추지 않고 잘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반면 진보는 이해관계가 다른 집단들 간의 평등과 다양성이 보호되는 조건이 만족되어야 자유를 인정한다. 누가 되었든 합의 없이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는 자유는 제재해야 마땅하다. 그래야 꽃밭을 더 오래도록 아름답게 가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두 진영은 목적지가 다른 것이 아니라 경유지가 다른 것이다. 만약 서로 비판해야 한다면 그 숨은 의도나 도덕적 결함을 걸고 넘어질 게 아니라, 각자 주장하는 방법으로 과연 원하는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지 없는지를 다루어야 한다. 그런데 서로 너무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끼리 서로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그럴 생각도 없으니, 상대방을 비정상이거나 나쁜 사람으로 보게되는 것 같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둘 중 어느 하나의 세계관에서만 살고 있지는 않다. 사람들은 가족, 직장, 친구, 취미, 학교 등 동시에 여러 집단에 소속되어있다. 어떤 조직은 보수의 세계관이 잘 맞는가 하면, 다른 조직은 진보의 세계관이 더 적합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양 쪽의 가치관이 혼합되어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하듯이 어떨 때는 보수처럼 굴고 어떨 때는 진보처럼 군다. 나이가 들거나 입장이 바뀌면 가치관도 바뀌는 경우가 많다. 대체적으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는 진보로 가는 것 같은데, 경제 측면에서는 보수로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사회는 워낙에 복잡하고 다양한 변수가 있기 때문에 한 가지 관점으로만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 중 어느 하나를 더 중요하게 여길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다른 하나를 완전히 없애기는 어렵다. 둘 다 각각 필요할 때와 장소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일관성을 지키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극단적으로 한 쪽 방향으로 정해놓고 모든 것을 그것에 끼워맞춰 해석하려고 한다. 옛날부터 사람의 성격 유형을 구분하는 방법들이 많이 있었다. 혈액형만 해도 4가지가 넘는다. 아직도 유행하는 MBTI 는 16가지나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 정치 성향은 꼭 진보와 보수 두 가지로만 나누어서 사람들을 그 틀안에 다 가두려고만 한다. 그러고는 한 쪽만 무조건 옳고 다른 쪽은 무조건 틀리다고 생각하며 그 근거를 찾고 정당화하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간혹 정치성향이 극단적으로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을 보는데, 자기만의 뚜렷한 가치관을 가지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수동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알고 지내는 사람이 있는데 돈을 안빌려줬더니 뒤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어려운 사람을 안도와준다고 내 흉을 보고 다녔다. 근데 알고보니 민주당 지지자네. 아, 민주당 새끼들은 다 개새끼구나. 난 국민의힘으로 가야지. 난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는데 불합리하게 갑질을 당했다. 알고보니 그 새끼가 국민의힘 당원이네. 국민의힘 새끼들은 다 개새끼구나. 난 민주당 지지해야겠다. 이런 식으로 개인의 경험을 확대하고 일반화해 다른 집단을 모조리 똑같은 무리로 간주하고 낙인찍는다. 어떤 진영 소속의 인물을 악마로 만들면  그것을 일반화하여 그 무리를 다 나쁜놈들로 간주해버리니까 참 한국인들은 요리해먹기 편한 민족인 것 같다. 누구든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으며 언제든 틀릴 수 있고 잘못할 수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누가 더 나쁜놈인지 싸우는 것이 얼마나 쓸데없고 소모적이고 해로운 짓인지 다시 한 번 되뇌이고 앞으로는 그런 바람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