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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이 없는 시대가 온다> 의 부제는 '경제적 자유인가, 아니면 불안한 미래인가' 이다. 책 표지에 영어로 'The End of the Job and the Future of Work' 라고 쓰여있는데, 그게 영어판 부제인 거 같다. 모든 변화는 누구에게나 평등하지 않다. 누군가에게는 기회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재앙이 된다. 이 책은 우버가 이끈 변화 속에서 기회와 이익을 잡은 사람들과, 그 반대편에 더욱 더 궁지에 몰려 힘든 삶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을 실제 사례를 통해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긱 경제든 공유 경제든 온 디맨드 경제든 뭐라고 부르던간에 그것들이 세상을 쥐락펴락 할 수 있게 해주는 에너지의 중심에는 신자유주의, 기술 기업, 모바일 플랫폼 기술 발달, 그리고 바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다. 1인 기업, 자영업자, 독립계약자, 프리랜서, 일용직, 임시직, 계약직, 아르바이트, 부업 등등 뭐라고 부르던 본질은 같다. 그들이 파는 것이 지식이든 기술이든 몸이든 그 가치는 시장 경제의 논리와 경쟁으로 그 값이 매겨지고, 일을 할 때만 보상이 주어지며, 일을 오래 많이 한다고 해서 그만큼 숙련도와 실력을 인정받아 보상이 많아지는 것도 아닐 뿐더러, 일을 하지 않을 때나 못할 때는 국물도 없다. 다시 말해서, 전혀 보호받지 못하고 언제든지 쓸모없어지면 가차없이 내동댕이 쳐지는 파리목숨이라는 얘기다. 물론 긱 경제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도 그런 사람들은 늘 있었다. 그러나 예전에는 그저 일부 운나쁜 사람들의 일이었다면, 이제는 모두에게 닥칠 수 있는 일상적인 일이 되어가고 있다. 이 책은 그것을 사례를 통해 경고하고 있지만, 정말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진지하게 예측해보거나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할 지에 대해서는 딱히 도움될만한 고민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을 읽고 난 후 노동의 미래는 장미빛이 아니라 핏빛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은 벌새가 날개를 펄럭이듯 빠르게 움직이고 변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람은 생각보다 변하지 않는다. 벌새가 아무리 날개를 펄럭여도 실제 움직이는 거리는 그에 비해 얼마 안되듯 말이다. 여기 1960 년대 임시인력 공급업체 켈리 서비스라는 곳의 광고가 있다. 역자가 설명하길, 1966 년 이전의 사명은 캘리걸 이었으며, 이후 '캘리걸' 은 성별과 관계없이 임시 노동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

* 휴가를 쓰지 않습니다.
* 임금 인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 일이 없을 때 돈을 줄 필요가 없습니다. (일감이 줄면 인력도 줄이세요)
* 감기, 허리 디스크, 치아 통증으로 앓는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사장님 돈을 받으면서 하지는 않습니다)
* 실업급여세와 사회보장연금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당연히 관련 서류 업무도 필요없죠!)
* 복지혜택을 일절 요구하지 않습니다. (기업에서 복지로 인해 발생하는 지출이 임금의 최대 30% 수준입니다)
* 언제나 사장님의 마음에 쏙 들 것입니다. (저희 켈리걸이 제구실을 못하면 돈을 주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무려 60년 전의 인력 공급업체 광고이다. 보라! 사장님들의 마인드는 60년이 지나도록 전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작은 이보다 훨씬 더 이전이다. 산업혁명 시기에 착취 당했던 아이들을 생각해보라. 어쩐지, 가만 생각해보면 이 모습은 중세 시대 노예와 다를 바 없어 보이지 않나? 자고로 기업 경영자들과 주주들이 원하는 직원의 모습이 바로 위와 같다. 일자리 확충이나 노동 유연성 같은 긍정적인 면을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고 있다. 노동자 보호법 완전 폐지, 전 국민의 비정규직화. 노조도 없고 파업도 없는 세상. 그들만의 유토피아. 바로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다. 그들에게 인건비는 더 나은 고객 서비스와 품질을 위한 투자나 사회 공동체의 안정과 공익을 위한 의무라기 보다는 아낄수록 좋고 그래야 하는 비용일 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월급은 더 줘야하고, 가성비는 점점 떨어지는데, 굳이 따박따박 월급을 주면서까지 데리고 있어야 하나? 하며 어떻게 해야 인건비를 줄여 돈을 더 벌 수 있을까 고민하는 고용주들에겐 비정규직이 답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비정규직 확산을 설파하는 긱 경제는 경영자들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에게도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여기 우버의 옥외 광고판 문구가 있다.

교대근무 X, 상사 X, 제약 X

이 짧은 문구는 답답한 직장을 떠나 자유로운 사업가가 되라는 메시지가 숨어있다. 예전부터 더럽고 치사한 직장 생활에 치를 떨며 '이 따위 회사 떼려 치우고 내 사업을 하겠어! 저 돼지새끼가 내가 일해서 벌어들인 돈을 나한테 안주고 지가 다 처먹고 있잖아!' 하며 창업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치관의 변화가 몰고온 수평적 사고방식, 꼰대 혐오 정서, 일과 생활의 균형 추구, 자유로운 삶에 대한 열망은 더 많은 사람들이 창업을 꿈꾸도록 부추기며 긱 경제를 새롭고 매력적인 기회로 보이게 만들고 있다. 

전통적인 개념의 직장에서 일정한 임금을 받고 정해진 일을 하는 것과 달리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팔듯이 노동을 사고 파는 긱 경제 시대는, 전문 지식과 기술을 파는 사람에게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물론 그것도 고객을 연결해주는 중개 시스템을 개발하고 운영하는 기술 기업이 수수료를 적게 받을 때 얘기지만) 한국에서도 관련된 앱들이 꽤 많다. 모바일 플랫폼 덕분에 어색하게 전화를 하거나 얼굴을 보지않고도 법적 상담이나 세무 상담 같은 것도 쉽게 받을 수 있다. 오프라인에서만 존재했던 온갖 인간 활동이 모조리 모바일로 옮겨가고 있다. 쉬운 접근성으로 활성화된 수요, 경쟁이 치열해졌지만 그만큼 더 넓어진 시장, 더 많은 기회, 그리고 성공 신화는 더 많은 사람들을 긱 경제에 동참시키고 있다. 

<직장이 없는 시대가 온다> 에는 답답한 회사를 때려치고 '긱스터' 라는 사이트에서 독립계약자로서 소프트웨어 개발 의뢰를 받아 돈을 버는 일을 시작한 프로그래머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일하고 싶을 때에 스타벅스에 노트북을 들고 가서 커피를 마시며 원하는 일감을 찾아 개발을 해주며 한동안 매달 1만 달러 정도를 벌었다. 그는 그렇게 일을 하고 실력을 키우며 꿈에 그리던 회사인, 엘론 머스트가 설립한 우주선 개발 기업 스페이스 X 에 들어갔다. 그는 프리랜서였던 때보다 돈도 덜 벌고 더 힘들게 일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거기서 일하다가 아니다 싶으면 다시 나와서 프리랜서로 살면 그만이죠" 라며 우주여행을 꿈꾸며 입사를 결정했다. 이와 정 반대편에는 메커니컬 터크나 테스크 레빗 같은 곳에서 건 당 10원 단위의 푼돈을 받는 단순 노동에 매달려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희소한 전문 지식과 기술을 보유한 사람들이나 운이 좋은 사람들의 성공 이야기를 볼 때는 한 번 더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 이면의 어두움을. 전문 지식과 기술을 익히지 못하거나 경쟁에서 이기지 못한 사람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 지구상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로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잘난 전문 지식과 기술도 언젠가는 사람보다 인공지능이 더 잘 익히고 활용할 것이라는 것을. 그렇다. 긱 경제는, 인공지능이 사람을 대체하기 전의 과도기일 뿐이다. 긱 경제의 대표주자인 우버의 최종 목표는 사람 운전 기사가 필요없는 무인 자동차이다. 그리고 그들은 조만간 분명히 그 일을 진짜로 해내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 인공지능이 사람을 대체하는 일은 운전 뿐 아니라 수없이 많은 다른 분야에도 벌어질 것이다.

<노동없는 미래> 는 인공지능 발달로 일자리가 점점 사라지는 미래를 예측하며, 오히려 '인류 역사상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간이 온다' 라고 주장한다. 인공지능 알파고가 바둑 천재 이세돌을 이긴 후, 인공지능 로봇이 사람을 능가하는 미지의 미래에 대한 상상이 폭발했다. 여러 분야의 수많은 자칭 타칭 전문가들은 인공지능이 사람들의 일자리를 모두 빼앗고 지배하는 어두운 미래를 상상하는가 하면, 그래도 인공지능이 결코 인간을 대신하지 못하는 일들이 있다며 인간의 자존심을 끝까지 놓지 못하기도 하고,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며 사라진 일자리 대신에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직업들이 생길 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책은 그까이꺼 일하지 말자! 지금까지 사람이 해왔던 일은 인공지능 로봇에게 맡기고 더 풍족한 삶을 누리자! 라는 과감한 주장을 펼친다. 간단히 '탈노동' 과 '기본소득제'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서 탈노동이라 함은, 우리가 일을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 급여를 받고 일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을 뜻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을 하든 안하든 누구에게나 똑같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만큼 부를 분배해주는 기본소득제가 필요하다. 물론 그 효과를 무마시킬만큼 물가가 오르면 곤란할 거 같은데, 그에 대해서는 딱히 언급이 없다. 아무튼 탈노동과 기본소득제라는 발상은 언뜻 들으면 얼토당토 않겠지만, 이 책을 찬찬히 읽어보니 정말 말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알쓸신잡> 에서 유시민이 기본소득제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생산성과 비용 뿐만 아니라 품질면에서도 언젠가는 인공지능이 인간을 훨씬 뛰어넘으면 기업은 사람을 고용할 필요가 없어진다. 일자리가 줄어들면 기업에서 생산한 서비스나 물건을 살 수 있을만큼 돈을 버는 사람들 역시 줄어든다. 최고의 효율성과 생산성이 인력 감축을 촉진하고, 그것은 역설적으로 소비자를 고갈시키는 것이다. 그 때문에 기업은 이익을 얻고 부를 창출하는 것이 더욱 힘들어진다. 결국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는 삐걱거리며 더 이상 작동을 하지 못해 사회를 지탱할 수 없게 될 것이고, 자본주의와 시장경제가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기본소득제가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노동없는 미래> 는 그와 비슷하게 기본소득제가 필연적으로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것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훨씬 더 적극적이고 다양한 관점을 제시한다. 

<노동없는 미래> 는 일자리를 어떻게 지키고 더 많이 만들 것인가 고민하기 이전에, 노동과 일의 역사와 그 의미를 먼저 고찰한다. '일의 과거' 편에서는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책을 인용하며 사적인 영역에서의 '노동' 과 공적인 영역에서의 '일' 을 구분했던 고대 그리스 문명을 언급했다. '노동' 은 그야말로 생존만을 위해 해야하는 동물적인 활동으로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보아 노예들에게 떠맡기고, 자신들은 자유인으로서 온전한 시민권과 인간적인 성취를 추구하기 위한 '일' 을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삼시세끼> 출연자들이 요리 자랑 하느라 일하는 것 정도는 소꿉장난 축에도 못낄 정도로 365일 하루종일 극한 노동에 시달린 노예 덕분에 예술과 철학과 교육에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있었고, 또한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며 (여성들은 소외당했지만) 문화를 꽃피웠다. 그러니까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일' 은 생계를 위한 수단이 아닌, 그들이 꿈꾸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위한 활동이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노예 10인분만큼 일하는 인공지능 로보트를 만들어주었다면 아마 크게 환영했을 것이다. 필요 없어진 노예를 어떻게 처분할 지 좀 고민이 되겠지만.

'일의 현재' 편에서는 노동과 일의 의미가 시대가 변함에 따라 어떻게 변화해왔고 현재에 이르렀는지 살펴본다. 대체로 지배층들이 신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이용해 일과 노동을 계급을 나누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사회 통제 수단으로 변질시킨 것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특히 신자유주의 세계의 계급에 대한 내용이 흥미롭다. 아마도 부와 사회 영향력, 생활 안정성을 기준으로 나눈 것 같다. 꼭대기에는 '우주 위에 군림하는 엄청나게 돈 많은 극소수의 글로벌 시민' 인 '엘리트' 계층이 있다. 그 아래에는 안정적인 정규직 봉급 생활자 계층인 '샐러리아트' 가 있다. 주로 대기업 직원이나 정부 기관 공무원이 이에 속한다. 그 바로 밑에는 프로페셔널과 테크니션이 합쳐진 '프로피시언' 이 있는데, 각종 컨설턴트나 독립적인 자영업자처럼 스스로 마케팅할 수 있는 희소한 전문 지식과 기술이 있거나 경우에 따라 고소득을 올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특정한 조직에 속하지 않고 자유로운 신분으로 일하기도 하며, 긱 경제와 같은 불안정한 고용 환경에서 오히려 더욱 번성할 수 있다. 변호사, 의사, 교수 등의 전문직이나 소규모 사업가들이 이 계층에 속할 것으로 보인다. 그 밑에는 전형적인 '노동자' 계층인 육체노동자 집단이 있다. 복지 국가와 각종 노동 규약은 주로 이들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이다. 육체노동이 아니라 하더라도 중소기업 노동자들도 이에 속할 것으로 보인다. 인구 수로 따지면 가장 많기도 하고, 국가와 사회를 지탱하는 허리이고 다리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이들은 아래 계층으로 내려가며 크게 쪼그라들고 있다. 바로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고용 조건에서 보호받지 못하며 일하는, precarious (불안정한) 와 proletariat (프롤레타리아) 가 합성된 '프레카리아트' 이다. 지금 긱 경제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계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아래에는 실업자와 소외된 사회 부적응자들이 있다.

뒤이어 인공지능와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이 일과 노동의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 흥미진진한 내용이 펼쳐진다. 마지막으로 기본소득제를 실험한 성공 사례와 연구 결과를 토대로 그 긍정적인 가능성을 고찰한다. 너무 다양하고 많은 내용들이 있어서 정리가 잘 안되는데, 그 대신 노동과 일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나에게 일이란 무슨 의미인가? 왜 그런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가? 반드시 그 의미를 고수하고 지켜야 하는가?

사람들은 교육 차원에서 아이들에게 교훈을 주는 동화책을 읽어주고는 한다. 나 또한 어릴 때 이솝 우화 같은 것들을 읽고 기성 세대의 가치를 습득했다. 아직도 아이들이 <개미와 배짱이> 를 읽을 것이다. 아무리 창의성을 강조하는 요즘이라 해도 전통적인 미덕으로서 성실성에 대한 믿음은 굳건하다. 아무리 젊은이들이 헬조선이니 노오오오력이니 하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다 해도, 근면 성실한 사람을 멍청하다고 우습게 볼지언정 나쁘다고 욕하지는 않는다. 누구나 들어봤을 말 하나.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성경에 나오는 말이다. 성실을 강조하는 것은 그에 따라 보상받을 것이라는 기대보다는 공동체 일원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뜻이 강하다. "물고기를 잡아주지 말고 잡는 방법을 가르쳐라" 는 말도 있다. 교육 분야에서 자주 나오기도 하지만 직업 능력 개발이나 복지 제도에 대한 각종 논쟁에서도 자주 나오는 말이다.

집단 생활을 하며 진화해온 인간은 당연히 성실을 강조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혼자서는 살 수 없고 서로 힘을 합쳐야 하는데, 누구는 일하고 누구는 놀고 먹으며 남이 생산한 것을 훔쳐 먹고 산다면 그 자체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훔치는 것과 다름 없었을테니. 그래서 너무 대놓고 얌체짓을 하는 무리는 경계의 대상이 되고 따돌림을 당해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도태된다. 때로는 이런 얌체들이 대세가 될 수 있는데, 스스로 생산하는 것 없이 남을 착취하는 개체들만 있으면 그 무리는 스스로 붕괴되어 자연스럽게 도태되고 다시 성실한 개체들이 늘어난다. 한편,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무리는 에너지를 더 소비하고, 그만큼 번식을 위한 힘이 낭비된다. 그 결과 자신의 유전자를 후손에게 전달하는 것이 더 불리해진다. 그래서 너무 지나치게 성실하고 희생하는 무리 역시 후손을 남기지 못한다. 때로는 이런 성실쟁이들이 대세가 될 수 있는데, 얌체들은 에너지를 절약하고 번식에 힘을 써서 상대적으로 성실쟁이들보다 우위에 서게 된다. 그래서 성실쟁이들은 다시 조금씩 도태된다. 이런 사이클이 반복되다 보면, 치열하게 눈치 싸움을 하며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고 적절히 행동을 변화하는 무리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인류는 이와 같이 성실한 유전자와 놀고 먹으며 착취하려는 사기꾼 유전자 간에 서로 경쟁을 하며 자연 도태의 원리로 균형을 유지해왔다. 우리 인류는 바로 그 무리들의 후손이다. 이것이 진화 심리학이 현재 인류의 미묘한 성격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죄수의 딜레마 게임 무대의 생존자들. <진화 심리학> 과 <이기적 유전자> 에서 이에 관한 흥미진진하고 자세한 설명을 읽어볼 수 있다.

죄수의 딜레마 게임 세계에서는 둘 다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둘 다 무너지고, 둘 다 협력하면 상생하는데, 한 쪽이 배신하면 배신하는 쪽이 극대화된 이익을 누린다. 액설로드와 해밀턴은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200 번 반복하여 경쟁하는 프로그래밍 대회를 개최했는데, 우승자는 겨우 4줄짜리 명령문으로 이루어진 간단한 전략이었다. 첫번째는 협력하고, 그 다음부터는 상대가 한대로 응수하는 것이다. 상대가 협력하는 한 계속 협력하고, 상대가 배신하면 똑같이 배신하고, 상대가 다시 협력하면 이전의 배신을 용서하고 똑같이 협력하는 '조건부 호혜성 원칙' 이다. 좀 더 너그럽지만 위험한 방법으로, '두 번은 봐준다' 전략도 있다. 실제 세계에서도 이 치열한 게임에서 비슷한 전략으로 살아남은 승리자들의 후예들인 현재 인류 역시 그런 성향을 지녔다. 누가 남의 피와 땀을 노리는 얌체 사기꾼인지 서로 눈을 번뜩이며 감시하는 것은 거의 인류의 본성에 가깝다. 그러다보니 인간은 공평한 것을 좋아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부당하게 상대적인 불이익을 받았다고 느끼는 것을 참지 못한다. 자신이 명분없이 부당하게 다른 사람들만큼 보상을 받지 못하거나, 다른 사람이 부당하게 자신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는 것에 분노한다.

누구나 노동과 일을 통해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믿음은 아마 인류가 집단을 이루며 살 때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과거 계급사회를 떠올려 보자. 그 당시 노동과 일은 신성한 '천직' 이고 '소명'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서구 사회의 이름들을 보자. 직업에서 유래한 이름이 많다. 흔한 스미스(Smith)는 그 유래가 대장장이다(BlackSmith). 익숙한 성 중에는 베이커도(Baker) 있다. 아마도 빵을 굽는 일을 대를 이어 했던 가문의 후손이었나보다. 테일러는(Taylor) 제단사의(Tailor) 후예인 것 같다. 그 외에도 많다. 우리 친구 해리 포터의 조상은 아마 도공이었을(Potter) 것이다. 당시 노동과 일은 각자 맡아서 해야 했던 역할이였던 것이다. 그것도 대를 이어서 해야 하는, 신이 주신 임무. 그런 세상에서 누군가 임무를 저버린다면 당연히, 비난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서양인들이 롤플레잉 게임을 만들었나보다.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에서도 힐러가 공격을 하겠다고 나서며 자기 역할을 소홀히 하면 무지하게 욕을 먹는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동양이라고 다르진 않았다. 중세 시대 동양 역시, 계급에 따라 해야 하는 일들이 정해져 있지 않았나? '팀' 혹은 '공동체' 을 조직해 서로 '협력' 을 통해 다른 팀이나 공통체와 '경쟁' 을 하며 '생존' 을 쟁취해야 하는 모든 조직의 구성원들은 각자 '역할과 책임' 이 주어진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서 나이와 직위가 사라지고 수평적인 문화와 자유로운 의견 교류가 활발해진다 해도 그런 조직의 법칙은 아마 변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예로부터 노동과 일은 사회 공동체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마땅히 져야 할 의무이자 역할이자 책임이었던 것이다.

그랬던 노동과 일은, 산업화 이후 인구 증가와 생산성 향상으로 인력이 과잉 공급되고, 자본주의와 시장경제가 세계를 지배하면서, 생계수단이며 동시에 자산의 성격을 강하게 띄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 해야 하는 의무에서 누가 차지할 것이냐를 두고 경쟁하는 자원이 된 것이다. 다른 나라의 말은 잘 모르지만 한국에서는 일을 그냥 일이라 하지 않고 일자리라고 부르지 않는가? 일에 '자리' 라는 말이 붙었다. 뭔가 의미심장하지 않나? 그런데도 아직도 노동이나 일이 누구나 해야 하는 의무이며 그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인간다운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신념은 변하지 않았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자신이 좋은 일자리를 가진 것을 자신이 운좋게 혜택을 받았거나 좋은 자원을 얻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은 그에 맞는 마땅한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그걸 세금으로 떼 가서 복지라는 이름으로 놀고 먹는 자들을 먹여 살리는 일에 쓴다는 것에 분개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일수록 더 그런 경향이 강한 듯 보인다. 일하지 않는자는 먹지도 말아야 하는데, 왜 정부는 일하지 않는자를 먹여 살려주느냐면서. 근데, 과연 그럴까?

자원 혹은 보상으로서의 일자리는 경쟁에서 승리하고 성공해야 얻을 수 있다. 성공 신화는 노력과 친구다. 그렇다. 성공에 노력은 필수다. 선생님들이나 강사들은 말하곤 한다. "누구나 열심히 공부하면 1등 될 수 있어요!" 맞다. 성공한 사업가들도 말한다.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대박날 수 있어요!" 맞는 말이다. 좋은 회사에 취업한 사람들은 취준생들에게 조언한다. "누구나 열심히 공부하면 대기업 취업할 수 있어요!" 틀린 말은 아니다. 잠깐만. 정말? 다시 한 번만 더 생각해보자. 이런 말들은 반만 맞다. 더 정확히 말하려면 뒤에 한 마디 더 붙여야 한다. "운이 좋다면 말이죠." 

경쟁 세계에선 경쟁자들 중에 나보다 잘난 사람이 많지 않기를 바래야 한다. 세계 1등이 되어 글로벌 갑부가 되고 역사에 길이 남을 수 있었을텐데, 하필 그 때 더 뛰어난 놈이 약간 더 빨리 태어나는 바람에 영원히 열등한 2등으로 남아 잊혀질 수도 있다. 시대나 환경도 매우 중요하다. 운나쁘게 전쟁통에 태어났다면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기회를 잡지 못하고 포화 속에 사라질 수도 있다. 아무리 노력하고 사업 준비를 많이 해도 요즘 코로나 같은 재앙이 닥치면 그런 거 소용없다. 아무리 피땀흘려 열심히 농사 지어도 가뭄이나 태풍을 만나면 망하기 십상이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자라도 신기술이 나오면 주인공이었다가 순식간에 구닥다리 애물단지가 된다. 개인적인 얘기지만, Java웹프로그램을 배우기 전에 ActiveX 를 배울까 고민했었다. 그 때 내가 만약 ActiveX 를 배웠다면 몇 년을 손해봤을 것이다. 오랜 인류의 역사 동안 사회 진출이 막혔던 수 많은 여성들을 생각해보라. 그 여성들이 만약 남성과 동등한 기회가 주어졌다면, 역사 속에 남은 수많은 남성 위인들은 지금 우리 기억 속에 없을 수도 있다. 그저 개인적인 운빨도 있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시험치는 날 배탈이 나거나 사고가 나서 다리가 부러질 수도 있다. 똑같이 모르는 문제라도 찍기 운에 따라 합격 여부가 판가름날 수도 있다. 크고 작은 선택들과 행운 또는 불운 몇 가지가 사람의 운명을 충분히 바꿀 수 있다. 운7기3 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것은 진리다. 

성공 신화 정도는 아니고 그냥 작은 성공 이야기라도 그 주인공이 되려면 다른 사람들이나 환경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제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도 굉장한 행운이 있어야 한다. 그런 행운이라도 잡아서 미미한 존재에서 성공한 존재로 거듭나려면, 사람들을 잘 다루는 감각 또한 필요하다. 그래서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은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노력을 많이 한다해도 안타깝지만 성공하기 힘들다. 많은 사람들에게 불행한 일이지만, 사람들을 잘 다루려면 외모도 중요하다. 키크고 잘생기고 이쁘면 사람들을 더 잘 움직일 수 있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막 도와준다. 사회성이 부족해도 외모가 뛰어나면 사람들이 막 이해해준다. 그러니 사람의 인생과 성공은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가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재능 뿐만 아니라 성격, 사회성, 특히 외모. 성공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이런 것들은 물론 후천적으로 개발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사람을 이기긴 힘들다. 에디슨이 말했던가. 99%의 노력과 1%의 뭐? 그가 아직 살아있다면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 일독을 권하고 싶다. 오직 자기만의 힘으로 혼자 성공했다고 생각하며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폄하하는 것은 오만이다. 

노력이 필요없다는 말은 아니다. 노력은 해야한다. 또 성공한 사람들이 노력하지 않았다거나 인정할 수 없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들만큼 노력하는 사람들은 많다. 성공한 사람들이 노력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실패한 사람들이 그만큼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누구든지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가능성은 있어도, 그 모두가 성공할 수는 없다.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학생 모두가 목숨바쳐 공부한다고 해도, 모두가 1등이 될 수도 없고, 그 모두가 일류 대학에 들어갈 수도 없고, 또 그들 모두가 대기업에 취업할 수도 없다. 정원이 그만큼이 안되니까. 인류 사회의 분배 구조는 절대 평가가 아니라 승자가 독식하는 상대 평가이다. 그것도 한 번 결정하면 어지간해서는 잘 바뀌지 않는 단판 승부에 가깝다. 기존의 승자들이 자신의 자리를 뺏기지 않기 위하여 장애물을 설치하고 방해하기 때문이다. 한 번 미끄러지면 다시 올라오기 힘들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승리자들은 자기 자리를 지키는 데 더욱 처절하다. 그러면서 계속 미끄러지는 패배자들에게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젊은 시절 10 만큼의 노력이 나이 든 후 100 만큼의 노력보다 더 많이 보상받고 인정받는 이유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고 타이밍을 놓치지 말라고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에게 강조하는 이유다. 이런 현대 사회의 불평등 문제는 개인의 노력 문제가 아니라 분배 제도의 구조적인 문제인 것이다. <20 VS 80 의 사회> 라는 책은 이 문제를 깊이있게 다루고 있다.

일과 노동의 성질이 변화한 것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자본과 기술이다. 처음에 앱스토어가 나왔을 때 누구나 앱 개발을 해서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대자본이 투입되고 기업들이 앱스토어에 뛰어든 이후 개인이 혼자 앱 개발을 해서 돈을 벌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어졌다.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마케팅도 중요해졌다. 사람들은 투입된 마케팅 비용에 따라 매겨진 추천 순위를 보고 소비할 서비스를 선택한다. 개인이 아무리 노력과 재능을 쏟아부어도 생산성, 가격, 마케팅 등 모든 면에서 대규모 자본으로 무장한 기업와 경쟁해서 이길 수가 없다. 소비자들의 손에 닿아 평가를 받을 기회조차 없다. 품질만 좋으면 누군가는 알아주겠지, 라는 생각은 엄청난 착각이다. 기업들이 돈이 남아돌아서 마케팅에 천문학적인 돈을 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앱스토어가 1인 사업가들이 아니라 기업들의 무대가 된 지 이미 오래다. 앱스토어만 그런 건 아니다. 자본은 전통적으로 소상공인의 영역이었던 사업들까지 손을 뻗쳤다. 커피숖, 빵집, 미용실, 안경점, 사진관, 동네 병원, 심지어 분식집까지, 1인 사업이었던 것들을 점점 프렌차이즈 기업들이 차지하고 있다. 

자본과 IT 기술의 결합은 기존의 정규직 노동자들의 일자리 뿐만 아니라,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의 사업까지 위협하고 있다. 자본가들과 그들의 팔다리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차지하고 그 이외의 사람들은 점점 주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일자리가 많아진다고 해도, 본질적으로 선택지는 오히려 줄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두 가지의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너 지금 쫄쫄 굶고 있지? 드럽고 힘들지만 잠깐 이거 하면 돈 조금 줄게. 할래? 싫음 말고. 너 말고 이거 할 사람 줄 섰어." 좀 과격하게 들릴 지 모르지만, 이것이 바로 현재 대다수 일자리의 민낯이다. 낙수 효과 신화를 신봉하는 정치인이나 경제인들이 대자본 대기업 중심의 사회 경제 제도 아래에서 생색을 내며 만들어내는 일자리들이 대체로 그런 선택을 강요하는 것들이다. 휘청대는 중소기업이나 파렴치한 악덕 가족 회사의 열악한 일자리보다 더 나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훌륭한 대안은 되지 못한다. 미래가 없는, 발을 디디면 디딜수록 낭떠러지로 밀려나는, 할수록 더욱 더 꼼짝못하고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일자리. 그마저도 없는 것보다 있는 게 차라리 나은 비참한 현실. 그건 누구 탓인가? 그 중에는 아예 포기하거나 벗어나기 위해 다른 것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면 그 일자리를 만든 사람들은 저봐라, 저 게으른 것들이 기껏 일자리 만들어줬더니 안하고 딴 짓한다, 하며 비난한다. 그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너라면 하겠냐?" 그런 일자리들은, 이러한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든 자들이 비난을 모면하고 떠넘기기 위해 만든 명분일 뿐이다. 

이미 세상이 그렇게 변하고 있는데, 인공지능이 발달한 사회에서는 그게 개선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지나치게 안일한 태도다. 인공지능이 우리의 일자리를 모두 빼앗는다고 해도 그 인공지능 로봇을 관리하기 위한 일자리나 그에 따른 또 다른 일자리가 생길 거라는 전망도 많다. 그래봤자 컴퓨터 공학 기술과 지식이 필요한 아주 적은 수의 일자리 아니면 그들이나 로봇들 뒤치닥거리하는 질나쁜 일자리 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안정적인 생계와 생활을 보장해주는 좋은 일자리는 언제나 부족했고, 지금도 계속 줄고있고, 앞으로는 더욱 그렇게 될 것이다.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미래에 인공지능으로 사라질 것으로 지목한 직업 목록을 검색해보라. 그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개인적인 의견으론, 몇 백년이 지나도 절대적으로 사라지지 않을 안전한 직업은 국회의원과 대통령 혹은 총리, 그 외 각 부처 장관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정치인들이 다른 건 몰라도 자기 자리만큼은 인공지능에게 내줄 법을 허용할 리가 없을테니까. 그 외 행정 처리를 주업무로 하는 하급 공무원 정도는 그냥 무조건 인공지능 로봇 대체 대상 1호다. 1년 365일 국민을 위해 1초도 쉬지 않고 밤새 효율적으로 빠르게 불만도 없이 일하며 친근한 목소리로 남편과 시어머니 흉보는 잡담까지 몇 시간이고 들어주며 말동무까지 해주는 친절한 인공지능 로봇 공무원. 멋지지 않은가? 사회 질서를 유지시켰던 일과 노동에 대한 전통적인 통념과 가치는 이미 변해버린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올가미가 되어가고 있으며, 결국 사회를 질식시키고 붕괴시킬 것이다. 이제 일과 노동이라는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것은 매우 복잡한 정치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오랜 인류의 유전자에 각인된 본성을 거슬러야 하는 매우 힘겨운 일이다. 

<노동없는 미래> 에서 말하는 탈노동과 기본소득제가 실현된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간단히 말하면 고대 그리스 시민과 같은 삶이다. 힘든 노동은 인공지능 로봇에게 맡기고, 모든 사람들이 생계의 위협에 두려워하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 꿈을 펼치는 그런 삶. 일부 지배자들이 만들어놓은 틀 안에서 구석의 낭떠러지에 매달린 채, 그저 주인님이 1초만이라도 잠깐 손을 잡아주길 바라며 생존에 몸부림 치는 종속적이고 수동적인 삶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자신만의 삶을 개척해나갈 수 있는 그런 삶이다. "이거라도 하든가 말든가" 라는 말을 듣으며 갑질을 당하는 삶이 아니라, "됐어 너나 해" 라며 떳떳하게 더 나은 곳을 찾아 떠날 수 있는 삶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망언이라며 쯧쯧거리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웃음을 선사한 국가혁명배당금당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머리 속에서 국가혁명배당금당을 지우고, 좀 더 진지하게 기본소득제를 생각해보자.

많은 사람들이 기본소득제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로, 도대체 그 돈이 어디서 나냐는 것이다. 두 번째로, 먹고 살 걱정 없게 모두 충분한 기본 소득을 얻게 되면 아무도 일을 하려 하지 않고 놀기만 할 거라는 시각이다. 먼저 비용 문제를 생각해보자. <노동없는 미래> 에 따르면, 영국의 '예술,제조,상업을 장려하기 위한 왕실 협회' 라는 곳에서 기본소득제를 시행할 경우 얼마나 많은 추가 비용이 들 지 계산했는데, 대략 국내 총 생산량의 1% 정도가 더 필요하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커보일 수도 있지만, 감내할 만한 수준이다. 기본소득제는 현행 복지 제도를 그대로 둔 채로 그렇게 하자는 것이 아니다. 현존하는 여러가지 선택적 복지 제도들을 폐지하고 보편적 복지인 기본소득제로 바꾸자는 것이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정부에서 국민 복지를 위해 지출하는 돈이 얼마나 많은지 잘 생각해보자. 국민 연금과 각종 생활 보장 지원금, 취업, 창업, 여성, 장애인, 자영업자, 중소기업 지원금, 기타 경제 활성화와 생활 안정이라는 이유로 정부가 여기저기에 뿌리는 보조금이 얼마나 많은가? 게다가 그런 제도를 실행하기 위해 대상을 선별하고 감시하고 통제하는 데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이거 다 기본소득제로 흡수시키면 (의료보험은 중요하니까 그건 남기고), 물론 추가적인 비용이 들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비관적으로 여길만큼 큰 추가 비용이 들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비용 문제가 처리된다면, 결국 기본소득제 도입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두 번째 이유, 즉 사람들의 고정관념이다.

과연 사람들은 정부가 조건없이 충분히 먹고 살 정도의 돈을 준다면 놀기만 하며 아무 일도 안할까? 분명히 그럴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평생 한 푼도 안벌고 쓰기만 하면서 놀아도 3대에 걸쳐 남들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살 정도의 재산을 보유한 사람들을 보세요. 놀고 먹나요? 더 많이 벌려고 아등바등 하잖아요? 그들은 외계인인가요? 그리고 한 번 더 물어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본인은요? 본인도 그럴 건가요? 아마 고용주나 갑의 위치에 있는 대부분의 주인님들은 자기들 빼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노예 근성에 젖어 있어서 채찍질을 하지 않으면 일하지 않고 놀기만 할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평범한 직장인 노예들 중에도 '나 같으면 먹고 살 걱정 없으면 당장 회사 때려치우고 놀 거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을 것이다. 정말 그럴까? <노동없는 미래> 에는 유니세프 같은 곳에서 몇몇 가난한 마을에 실제로 기본소득제를 실험한 것을 소개했다. 이를테면, "물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치지 말고, 물고기를 줘라" 작전이다. 생색을 내며 무슨 교육을 받아야 한다거나 다른 무엇을 해야 한다는 조건 따위도 걸지 않았다. 실험 결과, 그들은 지원받은 돈으로 스스로의 삶을 현명하게 개척하고 개선해 나갔다. 이 실험 결과들은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노예 근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편견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정말 사람은 원래 노예 근성에 젖어있고 특별한 주인님들만이 우리들을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구제해주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생각해볼 것이 있다. 주인과 노예는 무엇이 다를까? 무엇이 주인을 주인으로 만들고 무엇이 노예를 노예로 만드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주도하며 개척할 힘이 주어졌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자기가 정말 원하는 것도 아니고 보람과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는데, 그런 일을 시키지 않아도 부지런히 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 일은 자신이 선택한 일 아니냐고? 살인마가 희생자에게 너한테 칼에 찔려 죽을 건지 총에 맞아 죽을 건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줄게, 라고 말한다면, 그래서 총에 맞아 죽는 것을 택했다면, 그 사람은 선택할 권리를 누린 걸까? 그럴 리가. 그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했겠지만, 그것을 선택할 권리는 주어지지 않았다. 정말 원하는 것이 빠져있는 선택지 내에서 어쩔 수 없이 한 선택은 강요이지 결코 선택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사람에게 선택했으니 성실하게 임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폭력이다.

노예 근성은 타고난 것이 아니다. 길들여지는 것이다.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외부의 힘에 휩쓸리다 보면, 무기력해지고 의지를 빼앗긴다.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훈련받고 살았느냐에 따라 주인이 될 수도 있고 노예가 될 수도 있다. "받는 만큼만 일한다" 는 생각 역시 노예 근성이다. "조금도 손해보거나 이용당하지 않겠어!" 라는 마음으로 일한다는 것은, 그 일을 단지 생계를 위해서 할 뿐, 조금도 보람을 느끼거나 즐기지 못한다는 결정적인 증거다. 수동적이고 종속적으로 휘둘리는 삶이다. 노예의 삶이다. 그런 사람들은 먹고 살 걱정 없으면 당장 회사 때려치우겠다고 말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 역시 그럴 거야' 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제는 아예 스스로 나서서 받는 만큼만 일하겠다는 말을 살짝 바꾸어서 일하는 만큼 받겠다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런 제도를 환영하기까지 한다. 많은 회사원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자기가 남들보다 일을 잘하고 더 많은 일을 한다는 착각. 심지가 자기가 사장님보다 더 많이 일한다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물론 진짜로 그런 경우가 없진 않겠지만, 과연 사장님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스스로가 뛰어난 인재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내가 이만큼 많은 일을 하니까 일하는 만큼 받는 제도가 도입되면 난 정당한 보상을 받을 거야!' 라고 생각할 것이다. 반면 사장님은, '일하는 만큼 주는 제도가 도입되면 열심히 일 안하는 새끼들한테는 돈을 덜 줘도 될 거야!' 라고 생각할 것이다. 불행히도, 사장님의 눈에 뛰어난 인재는 극히 드물다. 사장님의 눈에는 하나나 둘 빼고 나머지는 전부 다 때려야 일하는 노예나 도둑놈들로 보인다. 누구나 사장이 되면 똑같아진다. 안그럴 거 같은가? 당신이 결혼한 사람이라면 생각해봐라. 배우자가 당신보다 일을 더 많이 하나 덜 하나? 아마 두 사람의 말이 다를 것이다. 가족끼리도 서로 딴 생각하는데, 회사는 말할 것도 없다. 많은 노동자들의 생각과 달리, "일하는 만큼 주는" 제도는 오히려 고용주들에게 유리하게 악용될 소지가 많으며, 성실하고 유능한 직원에게 더 많이 보상하고 그들을 보호하기 보다, 그들로부터 일의 보람을 빼앗고 성과를 악화시키며 더 나쁜 대우를 참고 억지로 일하게 만들 뿐이다. "정의와 질서와 발전과 번영" 이라는 명분을 위해 "노력과 기여에 따른 정당한 보상과 처벌" 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되는 모든 종류의 제도는 노예 근성이라는 전염병을 더욱 악랄하게 퍼뜨릴 뿐이다.

비슷한 얘기인데, 왜 직업에 따라 받는 보상에 차이가 있는지를 말할 때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청소부가 대학 교수처럼 돈을 벌 수 있다면, 누가 힘들게 공부하겠냐? 공부 안하고 놀다가 그냥 청소부나 하지! 그러면 아무도 공부하지 않고 놀기만 해서 결국 지구인은 모두 바보가 되버리고 말 거야! 오 이런, 맙소사. 그런 말은 미화원분들을 모욕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 분들이 사회에 기여하는 공로도 폄하하는 망언이요, 또한 인간이 오직 물질적인 보상과 쾌락만을 쫓는 단순한 생체기계라고 여기며 인류의 존엄성을 처참하게 짓밟는 망발이다. 정말 인간은 그런 존재인가? 다시 한 번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민들을 생각해보자. 노예가 있어서 일을 안하고 흥청망청 놀면서 삶을 허비할 수도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살았나? 전 세계적으로 인류 역사를 통틀어 노예가 없었던 문화가 없었다. 그들 모두 놀고 먹기만 했나? 우리 시대의 재벌님들을 생각해보자. 놀 때는 화끈하게 놀겠지만 사업하랴 관계자들 만나랴 이래저래 바쁜 분들이다.

노예 근성 때문에 기본소득제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면,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말한 것이다. 사람들은 보람없고 의미없고 힘들기만 한 일을 억지로 하기 싫어하는 것이지, 무조건 일하기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힘들더라도 보람있고 의미있다면 성취감과 재미를 느끼며 계속 그 일을 하기 원한다. 사람들이 그런 일을 찾아서 할 수 있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며, 그 시간 동안 생계가 안정되어야 한다. 기본소득제는 사람들이 생계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고, 그러한 생활의 안정은 스스로 자신의 길을 주도하고 개척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있다. 우리는 그 길을 통해 노예 근성을 치유하고 호기심과 의지를 되찾아 비로소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욕심많은 인간은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는 것에 켤코 안주하거나 만족하지 못한다. 더 잘 먹고 더 잘 살기 위해, 더 나은 무언가를 위해 움직일 것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면, 두려움이 줄어들고 모험과 도전 의식이 고취된다. 권력의 업악과 폭력이 힘을 잃으며 저질 악질 일자리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다양성이 활기를 띄게 되고, 그 결과 전반적인 사회 혁신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코미디 농담같아 보이는 국가혁명배당금당이 아니라 좀 더 멋진(?!) 이름의 당이 생긴다면, 그들이 사기꾼처럼 허무맹랑해 보이는 말만 떠들어대지 않고 여러 실험 자료와 이론과 진정성을 갖추고 탈노동과 기본 소득제의 실현 가능성을 보여준다면, 난 그 당을 지지할 것이다. 바보같은 생각일 것 같은가? 그렇다면 <직장이 없는 시대가 온다> 로 문제 의식을 느끼고 <노동없는 미래> 로 희망을 느껴보시라. 아, 물론, 인공지능 로봇으로 제대로 된 탈노동이 가능해지려면 베타고 감마고를 지나 오메가고까지 기다려야 할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릴 지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