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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6.25 전쟁이 끝나기 전에 태어났고, 어머니는 끝난 후 태어났다. 살짝 넓게 보면 베이비붐 세대다. 두 분의 어렸을 적 기억은 사뭇 다르다. 친할아버지는 이북 출신으로 전쟁이 금방 끝날 거라 생각해서 거의 맨몸으로 남한으로 내려왔다가 고생 끝에 겨우 정착했는데 화재와 사기 등으로 그나마 없는 재산도 탈탈 털려 길거리에 천막치고 살 때가 있었을 정도로 가난했다고 한다. 장남인 아버지는 공부를 포기하지 않고 대학에 가서 학원 선생 아르바이트로 학비도 벌고 가족 생활비도 벌며 나중에는 학교 교사가 되었다. 아버지는 본인이 부모님한테 십원 한 푼 받은 것 없이 자수성가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지만, 술 취했을 때 가끔은 자기 주위에 주는 사람은 없고 받는 사람밖에 없다며 신세한탄을 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을 물어보면 집에 식모를 두고 살며 미제 과자와 초코렛을 먹었던 얘기를 했다. 외할아버지는 어머니가 중학교 때 돌아가셨다. 남은 가족들은 버는 것 없이 가진 것을 쓰기만 하면서 살았고, 그렇게 상가 건물과 한옥집은 다 사라지고 10년 후에는 빈털털이가 되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부잣집 장녀였던 그 시절을 결코 잊은 적이 없었다. 마치 몰락한 왕조의 자존심 쎈 공주같은 느낌이랄까. 어머니는 대학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했고 졸업 후 유치원 교사 일을 했다가 나를 낳고 그만 두었다. 어머니는 본인이 직접 돈을 많이 벌지는 않았지만 우리 집이 중산층 수준으로 사는 것은 다 본인 덕분이라고 자주 말했다. 왜냐하면 자기가 복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버지 일이 잘 풀렸다는 것이다. 그래도 IMF 이후에 두어번인가는 아버지가 자수성가한 건 사실이고 지하 단칸방에서 시작해 지금 이렇게 살게 된 게 참 대단한다고 칭찬한 적이 있기는 했다.

두 분은 각자의 이유로 돈의 소중함을 강조했다. 특히 어머니는 좀 극단적인 편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건 돈이었다. 사랑이고 뭐고 돈이 있어야 가능하지 돈이 없으면 다 소용이 없다고 늘 강조했다. 돈의 소중함을 가르쳐준다며 어머니 집안 일을 거들거나 아버지 구두를 닦거나 뭔가 일을 해야만 용돈을 주는 부모들이 많았지만, 내 부모님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건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어머니는 사람이 쪼들려서 살면 심성이 꼬이고 천박해진다며 부족함 없는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내가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분위기였던 그 시대에 흔치 않았던 외아들인 이유도 그런 거였다. 둘이 나눠 가지면 쪼들리니까. 어머니는 아버지가 옆에 있을 때 그런 얘기를 더욱 더 힘주어 말했다. 아버지는 그럴 때 몹시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별 말을 하진 않았다. 그래서 난 어렸을 때부터 아무 대가 없이 그냥 용돈을 충분히 받았다. 먹고 싶은 과자를 아쉽지 않게 사먹을 정도여서 동네 친구들한테 과자를 사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뭐 엄청 가지고 싶은 것도 없고 엄청 하고 싶은 것도 없고 그랬다. 중고등학교 때 애들이 환장하는 나이키 농구화도 가지고 싶어한 적 없고 부모님한테 사달라고 한 적도 없다. 난 아직도 신발이나 옷이나 자동차 같은 것에 전혀 관심이 없고 그런 쪽에 돈을 거의 쓰지 않는다. 하여간 어렸을 때부터 딱히 돈을 쓸 일이 많지 않기도 했고 돈에 쪼들린 적도 별로 없었고 돈에 그리 큰 관심도 없었다. 책을 사서 보는 데 용돈을 좀 쓰긴 했다. 한 때는 오쇼라즈니쉬나 법구경 같은 책에 심취하기도 했다.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도 학비와 각종 비용 뿐 아니라 용돈도 받았기 때문에 그 때까지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서른 넘어서 취업하기 전까지 백수 시절에도 용돈을 받았다. 그 때 아르바이트를 몇 번 했는데 그것도 한 달에 두어번씩 학교 선배 일을 도와준 것이 전부다. 일련의 사소한 일들로 운좋게 뜻하지 않은 취업을 한 후 지금까지 근근이 벌어먹고 살고있는데,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미혼 중년 백수로 살고있을 지도 모른다. 부모님이 날 해외 유학 보내줄 정도로 돈이 많았다면 유학파 미혼 중년 백수로 살고있을 지도. 난 지금까지 살면서 그다지 쪼들리지 않았지만 쪼들림에 대한 공포심이 있다. 어쩌면 스스로 쪼들리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소극적으로 살아왔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실 아이를 낳지 않은 건 쪼들리며 살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다.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가 쪼들리지 않고 살 수 있게 할 자신도 없었고. 만약 내가 어렸을 때부터 돈에 쪼들려서 살았다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까? 어쩌면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당장 내일도 불투명한 요즘 시대엔 일부 상류층을 제외하고 누구나 쪼들리며 살고 있거나 그럴 운명이니까.

부모님은 돈이 중요하다고 늘 강조하셨지만 금융이나 부동산 같은 것을 잘 알지 못했다. 그저 나에게 돈이 중요하다는 말만 했을 뿐이다. 부모님들이 할 줄 아는 재테크는 절약과 저축이 전부였다. 나도 아직까지 할 줄 아는 재테크는 절약과 저축밖에 없다. 아니, 흠, 생각해보니 절약은 빼야겠다. 펑펑 쓰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끼며 사는 것도 아니니까. 저축도 요즘은 금리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 수준이니...사실상 내가 할 줄 아는 재테크는 현재로서는 없다고 봐야겠다. 사실 재테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이다. 일단 굴리고 불릴 정도의 돈을 벌어야 그걸 굴리든 불리든 말든 하지. 세상이 변하고 있지만 그래도 돈 버는 가장 쉬운 길은 공부다. 공부해서 대학 가고 직장 얻는 게 돈 버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많이 벌지는 못해도 예체능 분야에서 경쟁하거나 자기 사업해서 버는 것보다 백배는 더 쉬울 거다. 그래서 옛부터 부모님들은 자식들에게 공부를 강조했다. 돈은 중요하다. 공부를 잘 하면 나중에 돈을 잘 벌 수 있다. 그러므로 공부를 열심히 해야한다. 공부는 때가 있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빡세게 공부를 시켜야 한다. 교육 관련해서는 자식들에게 아낌없이 투자하는 부모들의 허술한 듯 그럴듯한 논리다. 어머니도 내 교육에 많은 시간과 돈을 들였다. 아버지는...바쁘셨다. 

어머니의 교육 방식은 채찍과 채찍이었다. 당근은 기억나지 않는다. 난 생일이 빨라 일곱살 때 학교에 들어갔다. 남들보다 한 살 어려서 교과 과정을 잘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서 속셈학원에 다니긴 했지만 어머니가 따로 더 공부를 시켰다. 남들 다 보는 학습지를 풀게 한 것은 물론이고, 어머니가 직접 문제를 만들어 풀게 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내가 배운 걸 잘 모르면 가르쳐줬는데 왜 모르냐며 혼을 냈다. 받아쓰기 연습할 때였던 거 같은데, '운동회' 를 '운동외' 로 잘못 썼는데 어머니가 틀렸다고 고치라고 했다. 난 뭐가 틀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고민하며 연필을 만지작거리는데 어머니가 손가락으로 탁탁 치면서 틀렸다고 다시 지적하는데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글자는 '외' 인 것 같았다. 몇 초 눈치를 보다가 '외' 의 'ㅇ' 위에다가 점을 찍었다. 당시 교과서나 학습지의 서체는 명조체 같은 것이었는데, 'ㅇ' 이 그냥 동그랗기만 한 모양이 아니라 위에 점이 있었다. 그걸 뭐라고 부르는 지 모르겠는데, 난 그 때 그게 없어서 틀린 건줄 알고 그렇게 했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그걸 왜 모르냐고 막 소리를 질렀다. 당황한 나는 너무 똑바로 찍었나 싶어서 떨리는 손으로 'ㅇ' 위에 점을 지우개로 지우고 그 위에 약간 삐딱하게 짦은 사선을 그었다. 어머니는 틀렸다는데 왜 자꾸 똑같이 틀린 걸 적느냐며 또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그런 어머니의 열정적인 교육 덕분인지 국민학교 때 내 받아쓰기 점수는 거의 90점이나 100점이었다. 그런데 국민학교 때 받아쓰기를 그렇게 잘 한 게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다. 사실 난 아직도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잘 알지 못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수백 번은 사전을 찾아보며 확인했지만 아직까지도 결제와 결재가 헷갈려 잘못 쓰곤 한다.

 

공부할 때 중요한 것은 예습과 복습이다. 어머니는 복습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저녁마다 내가 학교에서 필기해온 것을 확인하고 복습을 시켰는데, 난 워낙에 악필이라 내가 써놓고도 잘 못 알아보곤 했다. 어머니는 내가 글씨를 또박또박 잘 쓰지 못해 복습을 제대로 못한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글씨를 제대로 쓰지 못하면 공책을 사정없이 북북 찢어버리고 다시 쓰게 했다. 글씨를 또박또박 쓰려고 노력했지만 삐뚤삐뚤한 악필은 잘 고쳐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매일같이 공책을 찢고 또 찢었다. 난 지켜보는 어머니 옆에서 그 날 필기한 것을 몇 번씩 다시 써야 했다. 눈물로 범벅이 되서 공책이 쭈글쭈글해질 지경이었다. 글씨 교정 학원에도 다녔지만 나의 악필은 결국 고쳐지지 않았다. 그래도 더 이상 내가 써놓고도 잘 못 알아보는 경우는 없었다. 공책을 찢는데 지쳐버린 어머니는 그 정도에서 만족하기로 하고 나를 명필가로 만드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 때문인지 난 아직도 엄청나게 무지막지한 악필이다. 다행히 내가 써놓고도 잘 못 알아보는 경우는 아직까지 없지만. 흠 잠깐. 잘 못 알아보는? 잘 못알아보는? 잘못 알아보는? 뭐가 맞는 거지?


더하기 빼기는 배울 때 크게 어려웠던 것 같지는 않았는데, 나누기는 어려워서 익히는 데 많은 시간이 들었다. 나누기를 배웠지만 잘 이해가 가지 않아서 많은 문제를 틀렸다. 예를 들어 10 나누기 3 하면 몫은 3 이고 나머지는 1 인데, 몫은 2 고 나머지는 4 이런 식으로 풀곤 했다. 손가락 10개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거의 다 틀렸다. 똑같은 문제는 답을 외워서 다시 풀 때 맞췄지만 어머니가 숫자를 조금만 바꿔서 문제를 내면 틀려버리고 말았다. 그런 모습이 답답해진 어머니는 분노에 차서 소리를 마구 질렀다. 너무 울어서 눈이 팅팅 부은 바람에 문제가 잘 안보이기도 했다. 심하게 운 어느 날에는 점심에 먹은 짜파게티를 토했는데 면발이 콧구멍으로 나와 덜렁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 때 그걸 손가락으로 당겨서 뺐던가, 들이켜서 삼켰던가? 난 그렇게 어렵사리 나누기를 익혔다. 다행히 5학년 쯤 되고부터는 내가 멍청했던 게 아니라 단지 느렸을 뿐이었다는 게 증명되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산수가 점점 어려워져서 나중에 다각형과 원 둘레나 부피 같은 게 나오면서 어머니보다 내가 더 문제를 잘 풀게 되었던 것이다.

어릴 적 나에게 그런 어머니는 언제 터질 지 모르지만 어쨌든 터지고야 마는 폭탄이었다. 국민학교 3학년인가 그 쯤에는 가출 생각을 할 정도로 어머니가 너무 미울 때도 있었다. 그렇다고 늘 그런 건 아니었다. 가끔은 즐겁게 장난을 치면서 놀기도 했다. 어머니가 날 간지럽히면 방으로 도망쳤고, 어머니는 쫓아 들어와서 내 양 손을 붙잡아 꼼짝 못하게 한 다음 내 배나 옆구리 등에 입을 대고 뿌우뿌우 불어서 또 간지럽혔다. 그렇게 낄낄거리며 놀다가 낮잠을 자고 밥을 먹고나서는 공부와 함께 눈물 잔치가 시작되는 거다. 어머니가 날 그렇게 공포에 떨게 굴었을 때는 절대 유치원 선생님이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도 아주 어린 시절 내 사진 앨범을 보면 어머니가 유치원 선생님이긴 했나보다 싶기도 했다. 기저귀를 차고 돗자리에 앉아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내 사진 옆에 '햇님이 너무 방긋 웃어서 우리 아들이 눈이 부신가보네~' 라고 적힌 노란색 병아리 모양 색종이가 불어있었고, 침흘리며 영어 잡지 책을 입에 물고 앉아서 멍때리고 있는 내 사진 옆에는 '어머, 우리 아들이 벌써 영어 책을 읽네!' 라고 적힌 하얀색 구름 모양 색종이가 붙어있는가 하면, 걸음마를 시작한 지 얼마 안된 듯 금방 넘어질 듯한 포즈로 아슬아슬 발을 내딛는 사진들 옆에는 '우리 아들 춤도 잘 추네~!' 라고 적힌 황토색 강아지 모양 색종이가 붙어있는, 뭐 그런 식으로 꾸며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 어머니가 쓰고 자르고 붙인 것들이었다. 또 그러다가도 어머니의 고성과 손찌검에 눈물을 펑펑 흘린 날이면 '역시 엄마는 유치원 선생님이었을 리가 없어!' 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공부시키는 것에만 관심있지는 않았다. 사람은 다루는 악기 하나쯤은 있어야 하고 할 줄 아는 운동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늘 말했다. 어머니는 유치원 선생님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피아노를 칠 줄 알았다. 11평짜리 작은 아파트에 살았을 때도 집에 피아노가 있었다. 그래서 난 학교 다니기 전부터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어머니는 옆 집 형도 가르쳤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 알바비 얼마 받으셨겠지? 바이엘을 다 떼고 체르니 앞부분 조금 하다가 그만 두었다. 피아노를 치면서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하기 싫은데 억지로 시켜서 울었던 건지 못한다고 혼나서 울었던 건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둘 다이지 않았나 싶다. 중학교 때인가 어머니는 그 피아노를 외삼촌네에 갖다주고 전자 피아노를 샀다. 문화센터 같은 곳에서 재즈 피아노를 배워와서 집에서 연습하는 어머니를 보니 궁금하기도 하고 쿵짝쿵짝하는 전자음이 신기하기도 해서 나도 몇 번 즉흥연주를 해보곤 했다. 그 당시에 어머니는 기타도 배웠는데, 강요 비슷한 적극적인 권유로 나도 기타를 배웠다. 가볍게 하려다가 어머니가 비싼 기타를 사주는 바람에 열심히 하게 되었다. 포크 기타도 배우고 클래식 기타도 배웠는데, 난 코드 잡는 것보다 줄 하나씩 뜯는 게 더 재미있었다. 한 때 로망스나 그린 슬리브즈 같은 연주곡에 심취해서 손에 굳은 살이 박히도록 연습하기도 했다. 그 외에 한문, 서예, 미술, 수영, 테니스, 볼링, 스케이트 등등 중학교 때까지 학교 공부 관련된 것 이외에도 여러가지 학원을 다녔다. 그런데 남들 다 다닌 학원 중 내가 안다닌 학원이 하나 있다. 바로 태권도 학원이다. 어머니에게 왜 날 태권도 학원에 보내지 않았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내가 태권도 학원에 간 첫날부터 무섭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안보낸 게 아니고 못보낸 거라는데, 난 전혀 그런 기억이 없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입시 공부 외에 다른 모든 것이 밀려났다. 그 입시 지옥의 회오리에 모든 게 날아가버렸기 때문인지, 난 지금 다룰 줄 아는 악기는 하나도 없고, 운동도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고,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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