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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미안하다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저녁은 먹었냐고 물었다. 응, 유이랑 먹었어. 전에 애기했지? 얼마 전 들어온 신입 있잖아. 응, 알어. 뭐 먹었어? 어 뭐 그냥, 대충 먹었어. 그녀는 천천히 나를 돌아보더니 다시 딸기 바나나 쥬스를 내려다보며 그랬구나, 하면서 빨대를 만지작거렸다. 내가 에스프레소를 들고와서 다시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가 말했다. 우리 헤어져. 이유를 물었다.
"오늘 아침에 나오는데 우산에 구멍이 뚫려서 물이 새더라구. 근데 지하철타러 가는 길에 자동차가 지나가면서 물을 튀겨서 바지에 얼룩이 졌어. 엊그제 새로 산 건데. 아, 구두에 물까지 새서 양말도 다 젖었어. 슬러퍼 빤다고 집에 갖다놔서 사무실에서 신을 것도 없었는데. 게다가 점심시간에 식당에서...아, 거기 이제 다신 안갈 거야. 진짜 재수없어. 아무튼, 양치질하고 와서 컴퓨터를 다시 키는데 윈도우 업데이트 설치 한다고 뜨더라. 한참을 기다렸다가 재부팅했더니 멀쩡하던게 자꾸 이상한 에러 창이 떠. 오늘 보고서 쓸 것도 많은데, 아 자꾸 프로그램도 죽고. 그랬더니 나선배가 윈도우 다시 깔아주겠다더니 포멧을 하는 거야. 아 글쎄 근데 보고서 쓰려고 받아놓은 자료도 다 포멧해버린 거 있지. 아, 진짜..."
그녀는 휴우우 한숨을 쉬며 딸기 바나나 쥬스를 빠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빨대를 만지작거리며 다시 말했다.
"하...또 여기저기 연락해서 자료 다시 보내달라고 하구, 기다리구, 겨우 다시 엑셀도 깔고 일하려구 하는데 또 뭐 인증번호를 입력하라면서 자꾸 뭐가 안돼...후우....보고서 쓰느라 저녁도 못먹고 있는데 나선배가 햄버거를 사가지고 와서 주더라구. 나같은 선배가 어딨냐나? 수고하라면서 어깨를 주무르고 가는데, 아 짜증나 소름끼쳐 진짜...손가락도 개구리처럼 끈적거리는 게 징그러워 죽겠어. 아 씨, 밥맛이야 나 진짜 햄버거 싫어하는데...그리고 오는 길에도...아...아무튼, 근데 진짜, 아 글쎄 또 초코 바나나가 없다는 거야!"
한참을 듣고 있는데 도대체 뭘 말하려고 하는 건 지 이해가 가지 않아 다시 물었다. 그래서, 그게 이유야? 그러자 그녀가 눈을 빨갛게 뜨고 벌떡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근데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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